시 한 구절의 힘
시 한 구절의 힘
  • 이동희
  • 승인 2015.12.08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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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 ‘새벽’이라는 말이 부쩍 자주 쓰인다. 물론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함께 우리나라 민주화의 상징인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서거 때문이다.

 DJ는 ‘행동하는 양심’을 요구하며 독재에 신음하는 국민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게 했다. 이로 인해 DJ는 독재자의 손아귀에서 수차례 죽음의 고비를 맞기도 했으나, 결국 이 땅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이바지하였으며,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생각해 보면 DJ가 국민들에게 던진 한 마디, ‘행동하는 양심’은 민주화를 위한 구호 이전에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진 시적 표현이었다.

 YS는 1979년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에 격노한 박 전 대통령은 YS를 의회에서 축출했다. 이때 YS가 독재자를 향해 던진 말이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였다. 민주주의를 잃고 독재의 폭압에 신음하던 국민들은 이 한 마디에서 실낱같은 민주화의 열망을 이어갈 수 있었다. YS가 민주화의 열망을 비유적으로 던진 한 마디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저항의 의지와 함께 강력한 힘을 가진 시적 표현이었다.

 언어 중에서 가장 정교한 수식과 치밀한 의도를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대표적 양식의 글[말]을 시(詩)라고 한다. 시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지만 저렇게 의미하며, 동쪽을 건드리는 것 같지만, 서쪽을 치고 들어가는 말하기 기법이다. 이뿐만 아니다. 비유와 상징, 반어와 역설, 풍자와 풍류 등 온갖 수식적 표현을 동원하여 하나의 언어에 보다 많은 의미와 보다 특별한 아름다움을 담으려는 글쓰기 형식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시는 총칼에 비하자면 형편없이 무력하지만 역사의 물꼬를 바꾸는 강력한 언표(言表)의 힘을 지니고 있으며, 총칼은 시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지만 격변하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무너지고야 말 폭력의 하수인일 뿐이다. 그래서 ‘유신의 심장’을 겨눈 것은 한 발의 총탄일지 몰라도, 그 방아쇠를 당기게 한 원동력은 ‘행동하는 양심’과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오고야마는 새벽’이라는 시적 표현이 지닌 함축적인 힘일 수도 있다.

 ‘양심’은 내면의 동기이지 행동화할 수 있는 기제가 아니다. 그러나 내면화된 양심의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양심일 뿐이다. ‘새벽’ 역시 마찬가지다. 새벽닭이 울어야 아침[새벽]이 온다고 해서 ‘관제닭’이나 ‘기계닭’으로 새벽종을 쳐서는 진정한 아침이 오지 않는다. 독재가 악이며 민주주의가 선이라면, 악을 물리치고 선을 앞당기려면 내면의 소리에 행동이 뒷받침이 될 때 비로소 선이 될 수 있으며, 닭 모가지를 비틀어[현실]도 ‘새벽[민주]’이 오는 것이 자연의 순리인 것이다.

 그래서 새벽은 과연 왔는가? 세계적인 권위지 <뉴욕타임스>는 11월 19일자 사설에서 “박근혜 정부가 강압적으로 역사를 다시 쓰고 반대여론을 잠재우려 하고 있다. 마치 밤과 낮처럼 남한과 북한을 다르게 만들어온 민주적 자유를 거꾸로 돌리고 있는 점을 우려한다”고 지적하였다. 말하자면 ‘새벽’이 오지 않았거나, 일단 왔던 ‘새벽’이 다시 어두워지고 있다는 비판이다.

 성기완의 시는 ‘새벽’을 이렇게 야유한다. “새벽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아직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시간이라 말하겠어-<중략>-나는 세기말의 부랑자 걷고 또 걸어도 대답이 없는 저 푸른 큰 쓰레기통 왜 도대체 왜? 새벽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좆도 아니라고 말하겠어 그냥 큰 푸른 쓰레기통을 지나치는 시간이라 말하겠어” (성기완의 <푸른 큰 쓰레기통의 뜻을 지나며 묻는 새벽>에서)

 행동하는 ‘양심’도, 닭의 목이 비틀리면서도 열었던 ‘새벽’도 빛을 잃어가고 있다. 민주화의 제단에 한 몸을 바친 열사들의 통곡이 들리는 듯하다. 새벽이 왔다고? 민주주의가 물구나무 서는 현실의 새벽은 ‘좆도 아니라’고 했던 어둠이 새벽을 날치기하고 있다.

 “누구나 거의 다 역경을 견디어 낼 수는 있지만, 한 인간의 됨됨이를 정말 시험해 보려거든 그에게 권력을 줘 보라.” A.링컨의 말이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 것인가, 입맛에 맞는 역사로 바꿀 것인가, 그것은 권력이 아니라 결국은 인격-사람됨의 결과일 뿐이다.

 이동희<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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