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쳐나는 쌀, 쌀의 철학과 소셜픽션도 필요하다
넘쳐나는 쌀, 쌀의 철학과 소셜픽션도 필요하다
  • 이귀재
  • 승인 2015.11.24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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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아침에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수확이 끝난 가을의 들판을 거닐었다. 벼의 그루터기만 남은 황량한 논을 바라보면서 쓸쓸한 풍경보다는 넉넉하고 풍요로운 한 해의 결실을 맛보았다. 문득 논길을 걷다 보니 ‘근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거기에서 무궁한 힘을 얻었다는 들길의 철학가 하이데거가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들 누구나 널따랗게 펼쳐진 논밭을 보면 철학자가 되고 문화생태학자가 된다. 쌀과 논은 농민들이 피땀 흘려 가꾼 미학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푸른 벼이삭은 우리에게 신선한 산소와 정신적 아름다움을 가져다준다. 논은 비가 오면 넘치는 물을 가둬주는 담수공간으로서 거대한 저수지 역할도 해준다.

 벼농사에는 절기마다 풍경과 지신(地神)을 섬기는 민속놀이로 농경문화를 풍요롭게 일구었다. 그래서 쌀은 식량안보의 귀중한 자산이며 동시에 문화재(cultural goods)이며, 동시에 수출입 교역에서도 제외되는 비교역(non-trade) 대상의 특성을 지닌다.

 쌀과 식량은 공급과 수요의 시장법칙에 맡겨서는 안 된다. 쌀은 인간의 생존과 안전에 기본적인 재화이기 때문에 어느 나라든 시장가격이 아닌 공정가격으로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여 최소한도 굶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했다. 지금도 지구의 반절은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다. 세계가 식량을 호혜적 차원에서 접근하여 인류의 생존과 평화를 지켜야 하는 이유도 쌀에 내재한 문화·생태·비시장적 특성에 있다.

 올해에도 우리나라는 쌀독에 쌀이 넘쳐나서 문제다. 전국 3,900개의 양곡창고에서 넘쳐나는 쌀은 나라살림의 근본이 아니라 농가살림을 파탄 나게 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하였다. 현재 정부창고에 보관되고 있는 쌀 재고량은 약 140만 톤으로서 적정 재고량의 3배에 달한다. 정부도 쌀을 공공 비축하여 시장과 격리하거나 밥쌀용 수입쌀 판매량을 감축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쌀 수급 안정대책을 내놓고 있다. 앞으로 쌀은 의무적인 수입량 말고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가입할 경우에 저관세 수입물량도 해마다 늘어날 전망이다.

 남아도는 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쌀을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가치 있는 재화로 규정하여 소셜 피션(social fiction)의 사회적 상상력을 덧붙여보면 어떨까. 소셜 픽션은 가까운 미래에 일어났으면 하는 염원을 그리는 작업이다.

 우선 쌀 문제는 국제개발 협력 차원, 특히 남북간의 교류와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는 또 하나의 매개물로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 현재 쌀 문제를 동북아의 평화적 안정과 연계하는 호혜적 수출로 풀어가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은 세계 최대의 쌀 수입국이다. 앞으로도 중국은 빠른 경제성장과 제한된 자원 등의 요소로 토양의 질적 저하, 수자원 고갈, 오염, 농업 노동력 부족으로 쌀 수입이 더 늘어날 전망이다. 장기적으로 쌀을 수출하기 위한 플랫폼(platform)과 적극 구축하고 여기에 정부지원과 공적투자를 병행하여 농업기반을 지켜야 한다.

 전통적으로 교역은 국가 간에 서로 부족한 것을 바꾸는 호혜적 형태였다. 실제로 어떤 지역에서는 석유와 의료지원 사업과 바꾸는 현물교역을 실험하기도 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중국의 희토류 지하자원과 쌀을 호혜적으로 교역하는 것도 상상해본다.

 쌀은 이윤을 위한 교역대상이 아니다. 남북화해, 중국과의 수출에서도 단기적 이윤획득보다는 상호 보완적 차원에서 동북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문화와 비교역 재화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는 철학적 가치가 부여되어야 한다. 이런 중장기적 소셜 픽션 속에는 쌀을 통해 우리나라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이끄는 리더 국가가 된다는 비전도 포함되어 있다. 쌀 과잉의 문제를 오늘의 시야에 가두지 말고 미래의 상상력으로 풀어보는 방법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이귀재<전북대 생명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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