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수당’ 약인가 독인가
‘청년수당’ 약인가 독인가
  • 최낙관
  • 승인 2015.11.18 13: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용절벽으로 인한 청년실업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 심각성은 이제 인내의 수준을 넘고 있다. 취업을 못하고 마냥 부모에 얹혀사는 속칭 ‘캥거루족’을 넘어 ‘빨대 족’이라는 웃지 못할 신조어들이 우리 청년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대변하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9월 기준 경제활동인구조사를 보면, 전체 실업자 86만 6천 명 중 청년 실업자는 34만 1천명으로 청년층 실업률은 전체 실업률 대비 약 39.4%로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발표된 일련의 구직청년들을 위한 대안들이 정부와 지자체는 물론 여야의 대립양상으로 번지면서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다. 예컨대 경기도의 ‘일하는 청년통장’, 성남시의 ‘청년배당’ 그리고 서울시의 ‘청년수당제도’ 등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서울시는 내년부터 정기 소득이 없는 미취업자이면서 사회활동 의지를 갖춘 3,000명의 청년들에게 최장 6개월간 교육비와 교통비, 식비 등 월 50만원을 청년활동지원비로 줄 계획이라고 발표했고 이미 2016년도 예산안에 90억원을 배정하고 있다. 그러자 복지부는 해당 제도가 사회보장기본법상 사회보장제도로 사전 협의가 필요한 사안이라는 이유로 제동을 걸고 있지만, 서울시는 청년수당이 사회보장제도가 아닌 만큼 협의의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청년수당을 둘러싼 지자체와 정부의 힘겨루기가 본격화되고 있다.

 논란의 쟁점은 청년수당이 사회보장제도로 규정할 수 있는 복지사업인지에 대한 유권해석으로부터 출발한다. 사회보장 기본법 3조는 ‘사회보장’을 ‘출산, 양육, 실업, 노령, 장애, 질병, 빈곤 및 사망 등의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모든 국민을 보호하고 국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소득·서비스를 보장하는 사회보험, 공공부조, 사회서비스’로 규정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논쟁이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 같은 법 규정의 포괄성과 모호성에 기인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들여다보면 논쟁의 본질은 청년수당을 인기영합적 포퓰리즘이자 공공부조 성격의 선별적 복지정책이 아니냐는 성격문제로 귀결되고 있다.

 일차적으로 포퓰리즘에 관한 논란은 현시점에서 속단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보는 사람의 복지철학과 가치에 따라 판단은 전적으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도의 성격에 관한 문제라면 지금 논의할 수 있다. 만일 청년수당이 자격이 있는 3,000명에게 제공되는 급부라면 이 수당은 공공부조 차원에서 제공되는 복지임이 틀림없다. 여기서 지칭하는 자격이 예컨대 장애인 고용이나 노인 일자리와 같이 일부 청년들을 사회경제적 약자와 소수자로 규정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 우리의 청년들이 지금은 어렵지만, 근로의욕과 근로능력이 있는 우리 사회의 희망이라면, ‘고용촉진을 위한 사다리’로 포장된 현금지원은 오히려 건강한 청년들을 낙인찍는 독일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지원이 제도 밖에 있는 다수 청년구직자들에게는 또 다른 상대적 박탈감으로 작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바로 그 때문에 국민의 혈세로 일부 지자체에서 소수 청년들만을 대상으로 행하는 공공부조 성격의 급여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오죽하면 이런 대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는지 한숨이 나올 뿐이다. 청년수당에 대해 난색을 보이며 반대하는 정부의 태도가 궁색하기는 마찬가지다. 얼마 전 정부가 발표한 청년 고용절벽 해소 종합대책은 한심 그 자체일 뿐이다. 대책이라는 게 공공부문에서 교원 명퇴 확대, 포괄간호서비스 확대, 임금피크제 도입, 시간선택제 공무원 채용으로 5만 3,000명을 신규 채용한다는 안이었다. 민간부문의 신규 채용도 세대 간 상생고용 지원을 통한 일자리일 뿐이다.

 이른바 서울발 청년수당은 정녕 ‘독이 든 성배’인가? 진정 청년수당에 찬성하는 것이 취업난에 허덕이는 청년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진보의 가치이고 그것을 반대하는 것이 이 나라 청년들의 아픔을 도외시하는 보수의 독선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묻고 대답해야만 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청년수당에 대한 소모적인 이념적 찬반논쟁에서 벗어나 범국가적 차원에서 고용친화적인 환경과 현실적인 대책을 조속히 마련하는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최낙관(<예원예술대 사회복지대학원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