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 가옥 다시 읽기
김동수 가옥 다시 읽기
  • 이흥재
  • 승인 2015.11.01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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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수 가옥의 ‘안채’를 보면 누구나 여성적인 분위기가 난다는 것을 금방 느낀다. 반면 ‘사랑채’는 군살이 없는 몸매에 반듯한 자세의 사대부 선비의 모습이 연상이 된다. 어떻게 건축이 그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닮는지 참으로 신기하다. 99칸의 김동수 가옥은 김동수의 6대조인 김명관이라는 분이 지었다고 한다.

 길 따라 마음 따라 알콩달콩 정읍이야기에 의하면 김명관은 17세 때인 1772년부터 1784년까지 12년에 걸쳐지었다고 한다. 17세면 요즘으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쯤 된다. 12년간 지었다고 하는데 집을 완성했을 때는 채 서른 살도 안된 나이이다. 아무런 경제적 부담없이 마음대로 터를 잡고 집을 지으라고 하면 나는 과연 이처럼 200여년이 훨씬 지나고 나서 사람들이 감탄하고 감동할 만큼 지을 수 있을까?

 집의 한가운데 중심에 형태의 안채가 있다. 그 안채를 모양의 안행랑채가 감싸고 있으며 그 앞에 자의 사랑채가 있고 이 집 전체를 큰 자 모양의 바깥행랑채가 감싸고 있다. 마치 작은 성벽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하인들이 사는 호지집이 빙 둘러 8채나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2채만 복원이 되어 있다. 이런 구조는 조선 후기 어느 사대부 양반집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이다.

 이런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김명관의 조부는 당쟁 등의 큰 사건이 일어나면 죄인을 처형하거나 벌을 주는 직책을 수행하는 분이었다고 한다. 그런 일을 하다 보면 업무 속성상 많은 사람에게 원한을 사게 되어 항상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만 했다. 그래서 김명관의 조부는 어린 손자에게 일절 벼슬살이하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편안하게 살도록 했다고 한다. 그래서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 공동마을에 터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까닭으로 마치 작은 성처럼 밖으로 바깥행랑채가 기다란 벽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사랑채 안행랑채가 모두 안채를 감싸며 방어하고 있는 형태이다. 주변의 8개의 호지집 또한 마치 군대의 초소처럼 집을 빙 둘러싸면서 방어진지 같은 모습으로 읽혀졌다. 그래서 호지집 중에서도 안채 바로 뒤에 있는 집에는 하인들 중 가장 믿을 만한 하인을 살게 했다 한다.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와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는 안행랑채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다. 200여년전에는 남녀가 유별(有別)하다는 것을 공간을 통해서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때는 밝은 대낮에 부부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해가 지고 난 밤이 되어서야 남편은 삐거덕 소리가 나는 중문을 통해서 안채에 있는 안사람인 부인에게 갔던 것이다. 부부가 같은 방에서 자지 않으면 각방을 썼다고 하는 요즘 세태와 비교하면 상상하기도 힘들다.

 왜 안채와 사랑채로 생활공간을 분리해서 떨어져 생활하게 했을까?

 이 집이 지어진 정조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라 한다. 나는 이 집을 진경 건축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시대 그림을 진경산수라고 하듯.

 이흥재<무성서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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