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책을 바꾼다고 역사가 바뀌겠는가
역사책을 바꾼다고 역사가 바뀌겠는가
  • 이춘석
  • 승인 2015.10.15 17: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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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은 쿠데타입니까, 군사혁명입니까?”

뜬금없이 무슨 질문이냐고 하실지 모르겠다. 이제 막 글자를 뗀 아이들도 아니고 다 큰 성인들에게 ‘배추가 채소냐 과일이냐’고 묻는 것만큼이나 황당하다. 그런데 이 ‘황당한 질문’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거의 모든 인사청문회에서 ‘단골 메뉴’가 되었다. 더 가관은 후보자들의 답변이다. “답변이 어렵다”, “공부가 안돼 있다”, “다양한 평가가 진행 중이다” 등등 기상천외한 회피전술이 등장한다. 서울대에 판검사까지 지낸 후보자들의 답변이 중고등학생들보다도 시원찮다.

그런데 권력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자들의 답변만으로는 부족했던 듯싶다. 박근혜 정권은 아이들의 머릿속까지 바꿔놓고자 했다. 박근혜 정권 출범 이후, 우리나라 국사교과서들은 서서히 우편향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5.16에 대해선 가급적 비판을 자제하고, 장면 정권의 무능을 강조하며 쿠데타의 정당성을 강조하거나 혁명 공약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는 등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서술이 바뀌어갔다. 검인정 심사를 주관하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위 ‘뉴라이트’라고 불리는 극우파 학자들로 장악된 탓이었다. 그러다 이조차 성에 차지 않았는지 정부는 지난 12일 기어코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국정제를 확정했다.

그렇다면 정부가 만들려는 국정교과서는 어떤 교과서일까. 이미 국정제를 실시하고 있는 교과서를 보면 그 답이 나와 있다.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사회교과서의 내용을 잠시 들여다보자.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관련하여 교과서는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이 의병을 ‘대량 학살’한 것을 두고 의병을 ‘토벌’했다고 표현하는가 하면, 일제가 조선에서 쌀을 ‘수탈’해간 것에 대해서는 쌀을 ‘수출’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심지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에 대해선 일본이 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단순히 보수적인 시각을 넘어 일본에서도 극우파에서나 만들었을 법한 내용들이다. 그런데 이 교과서가 내년부터 우리 아이들의 교재로 쓰인다고 하니 참으로 경악할 노릇이다.

이는 분명히 반시대적이고 반역사적인 퇴행이다. 현재 교과서 국정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대부분 북한이나 베트남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이거나 이란, 이라크와 같이 종교적 특수성이 있는 국가들뿐이다. 독일, 일본, 캐나다 등 대부분 국가들은 검인정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영국,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들은 이미 자유발행제로 전환하였다. 헌법재판소도 국정제에 관하여, 국정제 보다는 검·인정제를, 검·인정제 보다는 자유발행제를 채택하는 것이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고 있는 헌법의 이념에 부합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국사에 대해서는 “어떤 학설이 옳다고 확정할 수 없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는 경우 다양한 견해를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미 20년 전인 1992년의 결정이었다. 지난 12일 정부가 국정제를 발표했을 때 해외 외신들 역시 박근혜 대통령이 교육을 과거 권위주의 시대로 되돌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부는 다양한 집필진을 구성하겠다고 밝혔지만, 전국적으로 국정화에 반대하는 시국선언을 한 교수나 교사 등의 수가 한 달여 만에 5만여 명을 넘어선 마당에, 일부 극우계열의 학자들을 제외하고 누가 집필진으로 선뜻 나서겠다고 할지 의문이다.

10월 12일은 교육에 유신이 선포될 날이다. 이는 살아 숨 쉬어야 할 역사를 박제로 만들어 권력자를 위한 장식장에 올려놓겠다는 발상이다. 정부는 내달 2일까지 이에 대한 의견을 수렴한다. 누구든지 찬성 또는 반대의견을 교육부에 제출할 수 있다. 그리고 정부는 이를 존중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이에 새정치민주연합은 이번 주부터 국민들의 여론을 모아 전달하기 위해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거꾸로만 퇴행하고 있는 역사의 시계를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이춘석<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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