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하늘을 담은 그릇
가을 하늘을 담은 그릇
  • 권익산
  • 승인 2015.10.15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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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게 빛나는 옥은 / 푸른 하늘에 비치네
한번 보는 내 눈조차 / 맑아지는 것 같아라

고려 말 이색이 노래한 고려청자를 찾아 가는 길은 예쁜 코스모스 길을 따라가다 만나는 부안청자박물관에서 시작된다. 변산의 산봉우리들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줄포만의 바다를 내려다보는 낮은 구릉지대인 이 일대가 고려시대 청자의 메카였던 부안 유천리와 진서리 청자 도요지이다.

푸른 하늘에 펼쳐진 구름사이로 학이 날아가는 모양과 물가에 늘어진 수양버들 사이로 오리가 한가로이 노니는 모습이 상감된 최상품 청자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옥을 귀하게 여기던 중국인들이 옥빛을 닮은 그릇으로 만든 것이 청자의 시작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발전한 자기 기술 위에 중국에서 혼란을 피해 넘어온 도공의 기술이 더해져 청자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처음 개경 부근에서 만들기 시작하던 청자는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었는데 11세기부터는 부안과 강진이 청자의 중심지가 되었다.

중국에서 배워 온 옥빛 청자가 고려에 와서 훨씬 깊이 있는 비색 청자로 발전하였고, 반투명의 은은하면서도 그릇 표면에 갈라짐이 없어 송나라 사람들조차 고려청자를 으뜸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부안에 고려 청자를 생산하는 도요지가 들어설 수 있었을까?

청자 생산지가 가져야하는 조건으로는 첫째, 원료가 되는 질 좋은 흙과 물이 풍부해야 하고 둘째, 그릇을 구울 때 필요한 땔감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산이 있어야 하며 셋째, 운반을 위해 강이나 바닷가 포구와 가까워야 했다. 이러한 조건에 딱 맞는 곳이 부안의 유천리와 진서리 지역이다. 이곳에는 청자 제작에 필요한 고령토가 다량으로 매장되어 있어 질 좋은 흙을 쉽게 구할 수 있고, 계곡의 맑고 풍부한 물과 변산의 울창한 숲이 가까워 땔감이 풍부한 지역이다. 또한 이 지역에는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개경으로 운반하기 위해 모아 두는 조창이 설치되어 있어 해상 수송에도 더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근처에는 수군이 주둔하고 있어 혹시 모를 침입에 대한 방어 시설 까지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천혜의 자연 조건과 부안 장인들의 솜씨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최고급 청자는 바닷길을 따라 부안에서 개경으로 옮겨져 왕실과 귀족들에게 공급되어 고려 문화의 깊이를 더하였다. 한편 인근의 선운사와 내소사 뿐 아니라 멀리 남원의 실상사나 익산의 미륵사에서도 부안의 청자가 발견되어 고려시대 큰 절은 부안에서 생산된 청자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배워 온 청자 제작 기술을 발전시킨 고려는 오히려 중국에 청자를 수출하기도 하였다. 중국, 일본은 물론 몽골과 이란에서까지 부안 청자가 발견되고 있어 부안 청자가 고려를 넘어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청자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12세기에 전성기를 누리던 부안의 청자는 13세기 이후 몽골과 왜구의 침입으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몽골이 일본원정을 준비하면서 고려에 900척의 배와 4만명의 병력을 요구하였는데 이때 나무가 풍부한 변산에서도 선박 건조가 이루어졌으며 백성들의 무리한 동원과 선박건조를 위한 나무의 소비는 인력 부족과 땔감 부족으로 이어져 부안의 가마도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이후 14세기에 왜구가 부안에 침입하여 조운선을 불태우고 노략질을 하였다는 고려사의 기록으로 보아 안흥창이라는 조창이 있던 부안의 유천리 일대도 왜구의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왜구의 노략질로 정상적인 가마의 운영이 불가능했을 것이고, 장인들은 왜구를 피해 흩어졌을 것이다. 청자 생산에 유리한 조건이 오히려 청자 생산이 중단되는 조건으로 작용하고 만 것이다.

육백년의 시간과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도굴로 많은 가마가 파괴되고 유물이 사라졌지만 여러 차례의 발굴 조사로 많은 청자 파편들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부안에 남아 있는 청자의 흔적은 제작 과정에서 인정받지 못한 파편들이다. 멋진 청자는 멀리 떠나보내고 못난 청자 조각만이 고향에 남아 있지만 그 조각들을 통해 우리는 청자의 메카 부안의 모습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권익산 원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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