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스스로 말하고 소통한다
공간은 스스로 말하고 소통한다
  • 권영후
  • 승인 2015.10.05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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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매일 공간을 이동하며 살아간다. 공간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며 시간을 따라 역사를 창조한다. 인간은 공간에서 태어나 배우고, 노동하고,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일생을 마친다. 행복과 불행, 즐거움과 고통의 흔적을 남긴다. 이 과정에서 공간을 폐허로 만들거나 되살리고, 강남과 강북과 같은 양극화된 공간을 만들어 낸다. 공간은 스스로 말하고 매일 새로움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렇게 변화무쌍하고 의미심장한 공간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공간은 스펙터클한 이미지로 인간을 압도한다.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은 고도로 축적되어 이미지가 된 자본이다”라고 지적했다. 고층빌딩, 성지, 유적지 등 거대한 물리적 공간은 인간을 물씬 숭배자로 만든다. 신을 찾아 경배하고 축복과 위로를 받는 성소와 역사를 코스프레한 관광지는 상품화, 박제화되고 있다. 청와대와 여의도는 정치인들이 매일 국민을 대상으로 지지를 얻기 위해 연기하는 극장정치의 공간이다. 극장정치는 주권자인 시민을 이미지에 집착하는 구경꾼으로 전락시킬 가능성이 크다. 스펙터클한 공간은 소통보다는 위압적이고 화려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권위적 공간에는 무한 경쟁에서 이겨 남을 지배하고자 하는 제국주의적 욕망이 내재하여 있다.

공간에서 축제는 일상적으로 열린다. 인간이 어울려 즐기며 상호교류하는 소통이 이루어진다. 이제까지 도시의 대로변은 남루한 뒤편의 속살을 감추고 화려한 풍광으로 치장한 포촘킨파사드의 역할을 했다. 근래에 낙후된 시장, 골목, 광장에 사람이 몰리면서 도시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축제가 열리고, 다양한 문화콘텐츠가 만들어지면서 시민들의 관심은 한층 높아졌다. 그러나 축제의 공간은 인간의 탐욕을 자극하여 재앙이 되고 있다. 문화예술가들이 공간을 활성화하면 옛도심이 번성해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과 문화 창작자들이 내몰리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서울의 홍익대 근처, 서촌, 북촌을 휩쓸고 지나갔다.

세계화의 물결은 공간의 구조와 성격을 바꾼다. 외국인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제주도는 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있지만 저비용, 저임금의 굴레에 얽매어 있다. 일본인은 급감하고 중국인이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실정이다. 글로벌 시대에 개방된 공간은 저렴한 비용을 지불하고 행복을 찾는 사람들로 붐빈다. 제주도에서 외국자본은 수익을 좇아 공간을 개조하고 가격을 올려놓았다. 개발의 손길은 한라산 중턱까지 닿았다. 세계화는 공간의 생산성을 높이고, 인간의 소비 욕망을 자극하여 언젠가 꺼질 거품을 키운다.

공간의 경계선은 난민을 양산한다. 난민은 인종, 종교, 국적, 정치적 견해 등을 이유로 국경을 떠나는 사람이다. 중동의 난민은 유럽과의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많은 희생자를 낳고 있다. 터키 해변에서 발견된 시리아 출신인 세 살배기 어린이 아일란 쿠르디의 시신은 공간의 소통 문제를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간에 대한 욕망은 전쟁을 일으키고 난민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된다. 경계선을 넘은 난민은 수용소라는 궁핍한 공간에서 자유를 느끼며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꿈꾼다. 난민에게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남과 북으로 갈린 우리는 한때 공간을 떠도는 난민이었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 또다시 난민이 될 수도 있다. 인위적으로 만든 남북의 경계선은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고 고통을 안긴다. 공간의 경계선을 없애고 자유를 보장하는 일은 인권을 보호하고 평화를 앞당길 수 있는 선결 조건이다.

공간은 귀향본능을 자극한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욕구가 강하다. 명절이면 나고 자란 공간을 잊지 않고 찾는 것은 태생적 본능이다.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우화’의 동굴은 다시 돌아 가야 할 운명적 장소다. 인간은 동굴을 나와 새로운 세상을 배회한 후 노년의 마지막에 동굴로 회귀한다. 베이비 부머들이 은퇴하면서 지방으로 귀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귀촌의 이유는 각양각색이지만 그들이 선택한 고향이나 한적한 지역은 귀거래사를 읊으며 돌아갈 수 있는 본태적 공간이다.

공간의 의미는 무한대로 변주된다. 인간은 공간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일에 소극적이다. 독점, 지배와 개발의 대상, 유희의 수단으로 간주할 뿐이다. 공간의 주체성을 인정하고 자신의 생명을 공간에 불어 넣는데 인색하다. 인간은 임시적 존재지만, 공간은 영원하다. 공간에 대한 앎은 정성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공간과의 소통은 공간이 항상 인간의 영혼에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시작된다.

권영후<소통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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