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올바른 인식(광복절을 맞이하여)
역사의 올바른 인식(광복절을 맞이하여)
  • 임보경
  • 승인 2015.08.17 16: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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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극기의 휘날림이 며칠간 우리를 애국심에 불타게 했다. 70주년 광복을 맞이한 축하 준비와 행사라고 언론과 매체를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시각으로 이번 광복 70주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최동훈 감독의 “암살”이라는 영화가 여기저기의 영화관에서 우리를 자극하기도 하였다. 광복이라는 단어속에 우리 민족의 36년간의 식민지 시절의 아픔과 슬픔속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간절히 원했던 사람들속에 우당“이회영”선생님과 간송“전형필” 선생님이 가슴깊이 떠오른다. 그 분들의 애국심은 이러했다고 한다.

.학생들에게 가끔 질문을 던진다. 여러분에게 수백만억의 유산이 상속되었다면 어떻게 무엇을 위해 유산의 가치를 활용할 것이냐고? 돌아온 답은 참으로 솔직하고 쿨했다. 자신을 위한 가치가 우선적이었으며 남는 여유는 가족 그리고 사회 기부의 순으로 말이다.

“목표를 이루지 못하였더라도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살다가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남기신 독립운동 초기 신민회 핵심으로 활동하며 헤이그 밀사파견을 기획한 우당 이회영(李會榮, 1867년 ~ 1932년 11월 17일)선생님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자 형제들과 함께 전 재산(현 시가 600억원)을 처분해 서간도(만주 삼원보 지역의 농촌)로 망명하여 이회영 형제가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3천500여명의 독립군을 양성하고 수많은 독립운동 등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항일무장운동의 토대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분들은 처절한 굶주림속에 생계를 이어갔으며 우당 이회영은 뤼순감옥에서 고문끝에 순국하셨고 해방 이후 조국에 돌아온 이는 6형제 가운데 5남인 성재 이시영뿐어었다. 

여러분은 또한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를 위해 전 재산을 바쳐 문화재를 지켜낸 멋진 분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간송(澗松) 전형필 (1906~1962)은 우리나라의 훌륭한 문화재들을 정말 많이 지켜내신 분으로서 서울에서 손꼽히는 부자 집안의 자제로 태어나 친부모와 양부모가 돌아가시고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게 되어 10만 석 지기 부자인 그는 오세창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어울림속에 상속받은 큰 재산을 문화재 수집에 쏟아 부었다. 세상의 유혹에 중심잡기 힘든 젊은 청년시절 그들도 우리의 젊은이와 다를 바 없는 청춘이었음에도 현실을 직시한 판단과 시대적 상황에 자신의 한 몸을 헌신한 것이다.

일제시대와 6.25전쟁이라는 큰 난리를 겪으면서도 우리의 문화재가 이만큼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간송 전형필 선생의 역할이 크다고 한다. 간송 전형필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은 우리가 흔히 역사 교과서에 볼 수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감청자운학문매병, 신윤복의 미인도 등이 대표적이다. 헐값에 배고픔에 팔아넘기고 도굴당한 우리의 문화재가 이렇게 거액의 돈과 정성의 대가로 지켜왔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아니된다. 

창살없는 감옥에서 일제의 억지논리로 순종의 서명이 없었음에도 불법으로 한일합병이 이루어진 가운데 군대가 정착한 헌병경찰제의 무단통치기간! “애기가 울면 호랑이가 온다가 순사(헌병경찰)가 온다”면 울음을 뚝 그칠정도의

무시무시한 그들의 통치방식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빼앗아 갔을까?

일본의 빠른 공업화로 그들의 토지와 농토가 감소하자 우리에게 대규모 토지조사실시를 거행하면서 40%의 토지 수탈과 조선 어업령들이 자행되었다.

일제와 세계가 놀란 광기에 찬 일본을 향해 3.1운동은 민족 해방을 위해 나선 사람들속에 독립에 대한 열망과 감격의 역사속에 일제의 새로운 문화통치 그들은 정말 반성한 것일까? 그들의 본질은 민족 분열정치로 친일파 우대정책을 펼쳤다. 이완용가족사진에서 시험지 답안에 이완용이 정답이라고 출제된 바가 대표적이라고 본다. 아마도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친일파가 민족을 등진 것으로 본다. 또한 그들의 “파리를 죽이고 애기를 살구자”라는 표어가 전시 행정의 표본으로 나왔던 것으로 일본 거주지의 절저한 위생관리와 한국인 거주지의 불결한 위생상태를 차별화해 그들의 기만적임을 한층 더 보여준 사례들이다. 게다가 그들의 빠른 공업화에 따른 농춘 인구의 도시화 이동과 쌀 생산량 감소로 폭동이 일어난 가운데 158%가 넘는 증산량정책에 우리의 농촌은 황폐해가며 고국을 떠나가는 자가 많았으며 이 때의 문학작품또한 우울함의 극치였던 것이다.

1929년 미국의 경제공황에 일본 또한 경제공황을 극복하기위해 식민지 늘리기 정책으로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군수산업 추진속에 일본은 쌀값 폭락과 혼란으로 쌀 수탈 중단으로 조선인 소작인 혼란이 찾아오자 이를 만연키위해 농촌진흥운동으로 그들의 만행을 감추기에 급급했으며 그래서 민족말살정책을 시행하면서 우리말 우리글을 금지시켰으며 내선일체를 강요하면서 우리와 일본은 한민족이라 내세우며 국가의 총동원령을 실시하였다. 자진 지원병요청이라 했지만 형식이었고 징용과 노동력 착취의 대상이 어린 학생들과 여성이었으며 그중에서 가장 잔인한 범죄 행위이자 씻을 수 없는 범죄인 종군 위안부이다. “여명의 눈동자”를 통해 우리는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속에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위해 헌신했으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광복절이란 특별한 날에 우리는 태극기 휘날림과 화려한 행사주도에 일시적인 눈맞춤이 아니길 바랄뿐이다.

현재의 일본인 태도에 우리는 분노한다. 역사의 잘못을 진정으로 반성할 때 참된 관계가 생길 수 있겠지만 그들의 태도는 또다른 범죄를 야기시킨다.

역사속에는 항상 빛과 그림자가 존재한다. 일제강점기가 우리를 분노케하고 서글프게한다하여 숨기고 싶고 부끄러운 역사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여 감추고 체계적인 정리를 게을리한다면 미래를 준비하는 청소년에게 우리는 어던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역사를 통해 무엇을 잘못했고 어떻게 당해왔는지를 제대로 알게한다면 일본인에게 올바른 지식과 정보를 요구할 수 있다고 본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이다. 역사를 잘 배워서 잘 지켜나가야함도 우리의 몫이다. 그래서 역사는 소중하고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우리의 과거이고 현재이며 미래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이 미래를 지배할 수 있다”라는 영국작가 조지 오웰의 문장처럼 역사를 더 잘 배워놓아야 할 것이다.

너무나도 풍요로워 부족함이 없는 이 시대 그래서 우리는 부족함의 부재에도 투정을 부리는 우리에게 한번 더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글을 맺는다.

임보경 / 역사문화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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