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독립자금지원 중심은 ‘정읍’
일제강점기 독립자금지원 중심은 ‘정읍’
  • 김경섭 기자
  • 승인 2015.08.16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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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소재 보천교가 10년 간 지원한 독립운동 자금은 최고 500억원

    전북 정읍이 일제 강점기 당시 해외 독립운동 자금지원의 중심지라는 주장이 제기돼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남창희 교수(인하대)는 ‘한미동맹의 민중적 기원’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남 교수는 이같은 내용의 논문을 광복 70주년을 맞아 오는 25일 경주현대호텔에서 열리는 제 5차 한국정치학세계대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남 교수는 논문발표에 앞서 16일 본보와 전화통화를 통해“최근 10년동안 일제 강점시 당시 독립운동 자금지원을 파악하기 위해 국내 현지 답사와 일본 총독부 사료 수집 등을 통해 전북지역이 상임임시정부와 민주독립군에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입증됐다”고 밝혔다.

    남 교수는 “독립운동 자금지원은 당시 정읍 입암면 대흥리에 본부를 둔 보천교에서 주도했다”며 “보천교에서 1920년부터 10년 동안 지원한 독립운동 자금은 최고 500억원(현재 화폐가치 기준)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고 강조했다.

    남 교수는 “비밀결사 조직으로 출발한 보천교는 총독부 감시망을 피했기에 그동안 활동상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전제하며 “보천교가 독립자금은 지원한 가장근거는 독립자금 10만원(현재 화폐기준으로 20억원)이 발각돼 옥고를 치르고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 독립지사 김홍규가 보천교 재정 간부다”고 제시했다.

    남 교수는 이어 ▲당시 보천교가 가장 큰 민족종교단체 ▲1930년대 이후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신사참배 압력에 굴복했지만 보천교 간부는 한 명도 없다 ▲1936년 일제가 보천교 본부 파괴 ▲독립운동과 관련해 수만은 신도 옥고 생활 등을 꼽았다.

 당시 보천교 신도 수는 총독부에서는 100만명, 종교사학자와 학계에서는 300만명~600만명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각각 주장하고 있다.

    남 교수는 “당시 최대 민족종교로 세력으로 활동했던 보천교가 지원했던 독립자금은 현재 밝혀진 규모는 ‘빙산의 일각’ 수준이다”며 “보천교는 처음부터 비밀결사로 출발해 총독부 감시망을 피했기 때문에 그 활동이 감추졌던 만큼 보천교에서 지원한 독립자금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남 교수의 이같은 주장은 보천교 실체를 규명한 정읍 향토사학자인 안후상·김재영 박사의 연구 결과와도 일치한다. 이와 함께 조선일보 항일 기사 색인이나 국가기록원 항일 사건 기록에서도 교주 차경석이 이끈 정읍 보천교가 가장 많이 검색된다.

    반면 보천교 간부였던 신채호 선생 부인이 만주정의부의 자금 지원을 보천교를 통해 시도한 점이나 보천교 간부인 임규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로 재정을 연결했다는 사실들은 아직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확인조차 못하고 있어 풀어야할 숙제로 남아있다.

    한편 장학수 도의원은 “1946년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 단독 정부를 선언했으며 김구 주석도 ‘정읍에 빚을 졌다’는 발언을 했다”고 말했다.

◆보천교

 1909년 증산교의 창시자인 강일순이 죽고 그의 부인 고판례가 흩어진 교인들을 다시 모아 1911년 일명 태을교(太乙敎)·훔치교·선도교 등으로 불리는 교단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강일순의 제자인 차경석이 교권을 빼앗은 뒤, 1921년 장차 세우게 될 나라의 국호를 시국(時國)으로 정하고 보화교(普化敎)를 선포한 다음, 이듬해 다시 교명을 보천교로 개칭했다.

본부는 전라북도 정읍의 대흥리에 두고 서울에 포교당인 보천교 진정원을 설치하고 각 지방의 요지에 지부를 두었다. 1929년 정읍에 궁궐 규모의 거대한 성전이 완공되었을 때는 장차 천자로 등극하게 될 것이라 하여 신도들은 차경석을 차천자(車天子)로 불렀다고 한다. 건장한 체구에 뱃심이 두둑하였고, 전국에 이름이 알려져 1926년에는 당시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직접 정읍 본부로 찾아와 면담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1924년부터 교단 내에서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해 1928년에는 이상호와 그의 동생 이성영이 보천교를 탈퇴해 김제 금산사 아래서 동화교(東華敎)를 창건했다. 이어 1936년 교주인 차경석이 죽은 뒤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해산되었으며 당시 헐린 서울 포교당 건물은 조계사를 짓는 데 건축 재료로 쓰였다.

김경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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