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는 자화상 같은 문인화
세한도는 자화상 같은 문인화
  • 진동규
  • 승인 2015.08.13 18: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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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쓸쓸한 하루였다. 하루 종일 쓸쓸하고 또 쓸쓸했다. 아쉽고 서운하다는 말은 얼마나 사치스러운가.

추사가 귀양길에 올라 제주까지 가는데 무장의 선운사(백파 선사가 있는 절) 그리고 반암 마을에 들러 쉬어가게 되는데 그때 남긴 추사의 시편들이 대상이었다. 제실의 주련으로 남아 있는데 그걸 고증해 보자는 자리였다. 지금은 김성수 집안의 제실에 옮겨져 있는데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서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구나 고마웠다.

그런데도 끝내 서운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심사는 무어란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고 들어가자. 문제가 된 소나무가 추사의 세한도를 나오게 한 것임을 밝히는 일이 먼저일 것이 아닌가. 세한도에 등장하는 배역부터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지금은 이야기가 한창 진행 중이고 보니 추사가 이 지역을 거쳐 갔느냐 그것이 제주도의 제작 연대와 어지간하기는 한 것이냐 따지고 보자는 것인데 그게 왜 내게는 쓸쓸한 기분을 안겼을까.

작품이 나오기까지의 상황은 어떻게도 설명할 수가 없다. 주제가 설정되면 작가는 맨 먼저 백지를 펴놓고 먹을 갈 것이다. 그리고 먹을 갈면서 구상을 할 터이다. 물론 백지는 펴기도 전에 백지보다 더 확고한 가장 핵이 될 만한 물상 하나를 붙들고 있었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이 세한도처럼 감사의 편지를 써야겠구나 하는 것은 확고한 주제다. 편지글의 내용을 명징하게 펴놓았다. 아주 분명하다. 그런데 그 편지 내용이 재미있지를 않은가. 소나무 한 그루 그리고 잣나무 몇에 집 한 채가 있는데 댓돌마저 없는 누옥 한 채다.

이야기는 여기서 다시 살펴야 할 부분이 있다. 문인들이 즐겨 채택한 문인화인데 이렇게 단순한 필획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저 붓 자국 어디에서 예술 작품으로서의 공명통을 울려냈다는 말인가. 구석구석은 낱낱이 분석적으로 접근하므로 예술작품의 격을 이끌어주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모두에서 밝혔듯이 추사는 송백의 푸르름을 고맙게 여긴다고 하면서 선묘가 아닌 담묵 처리한 점이다. 그런데 한 그루 소나무는 세필을 이용, 선을 또박또박 박아 놓지를 않았는가. 성근 솔잎이 있는 가지와 하나 기묘하게 죽은 가지 하나를 세워 놓았다. 끝에 뾰족하게 송곳처럼 세워 놓았다. 솔잎 몇 붙여 놓은 가지는 꺾어져서 아래로 뻗친 가지가 간신히 명줄을 이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세한의 소나무는 송곳 같은 찬바람을 맞고 있다. 아니다. 이미 몸이 송곳이 되어 있지를 않은가. 송곳이 되어버린 몸이 찬바람을 찢어 날리고 있지를 않은가. 아, 이것은 이 그림 속의 주인이 되어 있다. 자화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사람마다 다른 특별한 습관이 있다. 소위 작가의 개성이다. 그 개성을 생명으로 여긴다. 어떤 사람은 현장에 나가 사생을 하는 사람도 있다. 심하면 카메라에 담아 오는 작가도 있는데 그것은 거의 참고 사항일 뿐이고 거의 다 작가들은 현장의 이미지를 담아오는 것으로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현장에서 뽑아 올린 이미지가 주제가 되는 것이라서 더러는 빼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없는 것을 보태기도 한다. 주제를 향하여 재구성하게 되는 것이리라.

추사의 세한도는 후자에 속할 것이다. 소나무가 두 가지를 갖춘 것까지는 현장에서 보았던 기억을 끌어들인 것일 터, 그때의 제 귀양살이를 말하듯 허리 꺾인 모습에 울화가 치밀기도 했으리라. 아, 그런데 찬바람 앞에 선 제 모습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나는 이런 세한도의 바람 소리에서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지 않았던가.

진동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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