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하는 삶
성장하는 삶
  • 이동희
  • 승인 2015.08.04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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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전북노인회관>에서 주최하는 ‘여름철 문화-예술 특강’ 연사로 초대받아 말씀을 드리는 시간이 있었다. 대부분 현직에서 은퇴하고 이제는 생활의 여유를 의미 있는 시간으로 채우려는 분들이 청강했다. 현실에서 느꼈던 각박함을 뒤로하고 인생의 본질을 심량(深量)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신 분들로 보였다.

이분들께 대뜸 “가장 행복한 노인은 누구일까요?”라는 질문을 드렸다. 대답이 이구동성이었다. 경제적 풍요, 잔병 없는 신체, 원만한 가족관계, 활달한 취미생활, 좋은 친구 등 대략 짐작할 수 있는 답변들이 나왔다. 그러나 필자가 준비한 답은 “가족의 존경을 받는 노인”이었다. 늙은 나이에도 “우리 할머니!, 우리 할아버지!”하며 가장 좋은 것, 가장 편안한 것, 가장 예쁜 것을 챙겨드리며 섬김을 받는 노인보다 더 행복한 노인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렇게 존경받는 노인이 되려면 끊임없이 인문학 탐구를 멈추지 않는 삶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런 분들께 드린 특강 주제가 ‘성장하는 삶’이다. 아니 노쇠해지는 신체로 봐도, 흐릿해지는 정신으로 봐도 이제는 새로움보다는 기존의 심덕을 간직하는 데에 더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할 연세에 ‘성장’이라니, 의아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래도 성장하지 않으면 쇠퇴하기 마련인 유기체의 본질로 봐서 ‘성장하는 삶’은 연치를 따질 것 없이 모든 인생 앞에 가로놓인 당연한 과제이기도 하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며 몸의 건강을 최선으로 꼽는다. 일면 타당한 금언이다. 이와 함께 건강한 몸에 어떤 건전한 정신을 담을 것인가, ‘몸의 건강’만큼 ‘마음의 건강’도 함께 단련해야 마땅할 일이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살아왔는가? 자문할 때마다 한참 부끄러운 삶이 드러날 뿐이다. 그래서 ‘건전한 정신에 건강한 육체’가 깃든다고 금언을 바꾸어야 마땅한 것이라며 반성의 계기로 삼기도 한다.

실제로 이런 삶으로 장수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 성누가국제(聖路加國際) 병원의 히노하라 시게아키(日野原重明) 이사장은 100세가 훨씬 넘어서도 현직에서 활동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건강한 신체에서 건강한 정신이 나온다.’는 말은 옛말입니다. 의학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어요. 이제 장수비결은 신체보다 정신건강 유지에서 찾아야 합니다.”

정신 건강 유지의 비결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바로 인문학 탐구에 있다. 인문학 정의가 어떻게 내려지건, 인문학 핵심에 다가서려는 필수 활동은 바로 ‘읽기와 쓰기’다. 어떤 고담준론을 펴는 논객이건, 어떤 현자 학자건 ‘인간을 최고의 가치와 의미’로 두는 인문학의 확립은 바로 ‘읽기와 쓰기’의 결과일 뿐이다. 독서와 창작하는 삶이 바로 정신을 활성화시키며, 그런 활동을 통해 ‘어제와 다른 나’를 실현시킨다. 날마다 성장하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

‘읽기’는 인쇄된 책을 읽는 것을 포함해서 세상을 깊고 넓게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쓰기’란 문자를 통한 표현활동을 포함해서 세상에 대하여 정론을 세우려는 노력을 말한다.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는 노인이 아니라, ‘뒷방늙은이’로 가족과 젊은이들에게 외면받는 첫 번째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읽기와 쓰기를 외면해 온, 즉 인문학적 성장을 애써 무시해 온 삶의 결과일 뿐이다.

며칠 전에는 그렇게 성장하기를 원하는 분들과 두 번의 나들이를 했다. 한 번은 가까운 <전북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2015 전북청년작가전”이었고, 또 한 번은 좀 멀리 서울 용산 <국립박물관-특별전시실>에서 전시하고 있는 “쇼팽과 코페르니쿠스의 고향-폴란드, 천년의 예술”이었다. 두 번의 나들이 역시 세상을 ‘읽고-쓰기’ 위한 인문학 나들이였던 셈이다. 미술전을 관람하는 일이 인문학을 탐구하는 일이 되며, 그런 탐구활동이 자신의 삶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된다는 것은 따로 강조할 필요도 없었다.

1996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폴란드의 여류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두 번은 없다>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이런 인문학[시]로 성장한 노인을 어떤 가족, 어떤 젊은이가 ‘뒷방늙은이’로 하대하겠는가?

이동희<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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