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
비겁
  • 나영주
  • 승인 2015.07.22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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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호사가 되기 전 한 언론사의 필기시험을 본 적이 있다. 당시는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유행이었고, 언론사 필기시험 주제는 하나같이 ‘당신이 생각하는 정의는 무엇인가’였다. 그런데 필자가 시험을 본 언론사는 이를 살짝 비틀었다. ‘당신은 언제나 정의로울 수 있는가’ 당시 시험장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언제나’라는 부사에 조응하는 정의라는 단어의 울림. 정의의 속성을 간파한 물음이었다.

 인생을 오래 살지 않아서 정의와 불의 가운데 선택을 강요받는 시험에 든 경험도 없고, 단지 관념적으로만 정의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을 뿐이라 감히 정의에 대해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비겁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나름의 생각을 하고 있다. 김수영은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에서 비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옹졸하게 욕을 하고’

 김수영은 작은 악에는 철저히 정의로운 척하면서, 거악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행태를 비겁이라고 본 듯하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불의는 쉽게 거부할 수 있다. 보통 그런 사람들을 두고 ‘매너가 좋다’든가, ‘저 사람 참 양반이야’라는 평을 한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나치 전범들도 좋은 배우자이자 부모이고 친근한 이웃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거악’을 마주했을 때 그들은 불의를 선택했다. 그 순간이 평범한 시민들에게는 인생에 한번이나 찾아올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국가의 중요한 직책에 있는 자들은 말할 나위 없이 매순간 찾아올 것이다.

 법은 정의와 쓰임새에 있어 혼용되곤 한다. 사실상 동의어다. 따라서 사람들은 정의를 법에 묻는다. ‘배고파서 빵을 훔친 사람은 징역 3년을 사는데, 수백억을 횡령한 재벌 총수는 왜 집행유예를 받는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한 사람은 국방의 의무를 거부한 죄로 교도소 수감되는 반면 군사기밀을 넘겨 이적행위를 한 장성은 집행유예의 선처를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에게 법률전문가로서 가중처벌이니 상습범이니 하는 이야기를 해봤자 소용이 없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경제사범을 사면해 준다면, 성폭행 피해자를 위해 성폭행범의 전자발찌를 풀어주어야 한다’는 대통령의 사면을 비꼬는 트위터 글에 대고 사면권은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의 고도의 통치행위라고 말해봤자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대법원은 지난 16일 국가정보원의 이른바 선거개입 사건에 대한 고등법원의 판단을 전원합의체 만장일치로 파기환송 했다. 재판장 양승태 대법원장은 대법원은 법률심이기 때문에 사실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이버활동이 정치관여행위 및 선거운동에 해당하는지, 그 실체에 관한 원심 판단의 당부를 살필 수 없다고 하면서 고등법원에서 증거능력을 인정한 ‘시큐리티’와 ‘425지논’이라는 텍스트 파일의 상당부분이 출처를 명확히 알기 어려운, 매우 단편적이고 조악한 형태이므로 실제 어떻게 활용했는지 알기 어렵고 통상적으로 작성된 문서가 아니므로, 형사소송법 315조 2호와 3호의 당연히 증거능력이 인정되는 문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보았다. 유무죄 판단은 할 수 없지만 유무죄의 판단의 결정적 증거라고 할 수 있는 텍스트 파일의 증거능력은 없다는 취지다.

 법을 알지 못하는, 그러나 여전히 법이 정의라고 믿는 일반인들이 위 판결에 대해 묻는다면 또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형사소송법상 전문증거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해야 할까. 정치개입은 했지만, 선거개입은 하지 않았다는 1심 판결을 묻는다면? 법률가들은 흔히 일반인들의 정의에 대한 관념에 대하여 ‘법감정’이라는 말로 쉽게 그들의 판단을 로고스의 정반대편에 있는 파토스의 영역에 넣어버린다. 혹은 정치적 이슈에 대해 정치적이지 않은 태도로 정치적인 판단을 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법은 언제나 정의롭다. ‘결정적인 순간’을 제외하고.

 나영주<법률사무소 신세계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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