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통(不通)과 고통(苦痛)
불통(不通)과 고통(苦痛)
  • 황경호
  • 승인 2015.07.14 15: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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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한 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갑작스런 업무로 외국출장 중이니 이미 예정되었던 모임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지인이 주축이었던 모임인지라 당연히 연기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평소 그 지인이 워낙 즐거운 삶을 추구해왔던 터라 지레 생각했었다. 아마도 좋은 기회가 생겨 놀러 가면서 업무 핑계를 대는구나 하고 말이다. 해서 모임을 하기로 한 다른 지인들과 그 친구의 행태를 곱씹게 되었다.

 하지만, 그 지인이 출국하지 않은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유인즉 어머니께서 갑작스런 뇌경색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시다 의식불명의 상태가 되셨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부담을 줄까 봐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서 그 지인에 대한 선입견으로 오해했던 것이 어찌나 부끄럽고 민망했던지 수일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그 감정이 가시지 않고 있다.

 비록 이유야 어떻든 서로 불통이 심한 고통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우리 삶의 모든 면에서 서로 소통하지 못하면 육체와 정신적인 고통은 물론 사회적 고통까지도 뒤따르게 마련이다. 더욱이 요즘같이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 불통으로 야기되는 다각적인 통증은 정말로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기 일쑤다.

 동양의학서에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則不痛 不通則痛)이라는 말이 있다.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병이 난다는 말이다. 육체에서는 기혈(氣血)이 제대로 소통되어야 하고 사회는 구성원들의 뜻이 서로 통해야 육체든 사회든 건강하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변은 불통의 늪에 빠진 채 도처에서 신음소리가 난무하다.

 현대의학이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있다는데도 전인적 관점보다는 국소적 관점에 집착하거나 밥그릇을 위한 진흙탕 싸움으로 의학간의 소통을 외면하면서 국민의 고통이 사라지기는커녕 더 심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 역시 불통으로 인한 고통이 난무하고 있는데 작금의 정치판을 볼 때 소통에 대한 기대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국민들은 날마다 불통으로 인한 고통으로 울부짖고 있음에도 정치판은 아예 귀를 닫은 채 제 욕심 채우기에만 급급해하고 있는 모습이다. 최근 자영업자들은 세금폭탄으로 아우성이다. 매출이 크게 늘지 않았는데도 세금은 전년보다 무려 20~30% 이상 폭증했다며 하소연이다. 국민들이 그토록 주장하고 있는 법인세 인상 등을 통한 세수확보에는 메아리조차 없는데 말이다.

 이렇듯 정치판은 이미 소통은 사라진 채 불통에 익숙해져 이로 인한 그들의 통증은 둔감해졌지만, 국민의 고통은 상대적으로 커져만 가니 이를 어쩌랴.

 이러한 모습이 어찌 정치판에만 국한되고 있겠는가!

 법조계와 교육계, 언론계는 물론 우리 사회 곳곳에서 불통으로 인한 고통이 이미 만연되고 있다. 그래서 신문이나 TV를 보기가 겁난다. 소통되어 편안한 우리의 모습을 보기가 정말 드물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람이나 사회가 건강을 유지하며 살아가는데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 이러한 까닭에 옛 사람들은 이를 강조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면서 소통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사람으로서 소통이라는 것을 빼고는 그 사람의 존재감을 인정받을 수도, 남을 인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시인도 소통을 노래했다.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를 통해 자신은 상대와 소통을 하기 전에는 아무런 존재도 아닌 그저 물리적 존재일 뿐이지만 자신과 상대가 소통을 시작하면 물리적 존재 이상의 것이 되는 것이 소통이 갖는 힘이며, 상대에 의해서 자신이 결정된다고 노래했다.

 이러한 소통이기에 어떤 이유에서라도 불통으로 인한 단절은 고통을 초래하며 이는 혐오, 미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부정적 감정을 불러온다. 결국에는 이러한 고통이 지속하면 더 이상의 소통을 어렵게 만들고, 자신은 물론 더 나아가 사회를 파괴하게 된다. 그렇기에 불통으로 인한 고통은 소통으로 풀어야 하며, 새로운 소통의 통로를 찾아감으로써 소통이 다시 형성되고 서로 고통을 치유해야 한다.

 소통의 시작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손을 내밀면 그동안 막혀 있던 벽에 작은 균열이 생겨 단단한 벽도 금방 무너지게 된다. 또한 역지사지(易地思之)해보자. 그러면 남을 배려하고 공감하게 되어 자연스레 소통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경쟁과 갈등을 피할 수는 없지만, 인간미 넘치고 배려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불통 타파에 노력하자.

 황경호<전주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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