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 소나무, 무장 동헌의 소나무
세한도 소나무, 무장 동헌의 소나무
  • 진동규
  • 승인 2015.07.06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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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한이 송백의 푸르름을 일깨운다고 했다. 제주도 귀양지에서 쓴 편지글이다. 제자 이상적에게 자기의 처지를 그려 보낸 <세한도>의 절절한 표현이다. 귀양지에서 맞는 세한은 혹독하기도 했으리라. 이 그림이 중국으로 또 일본으로 떠돌다가 돌아온 사연 또한 기구하다. 지난 일이니까 그 기구한 행적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회자하지만 아슬아슬하기도 하다.

 완당 자신이 소재로 선택한 송백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곧게 서 있는 잣나무가 몇 있고 허리 꺾인 소나무가 한 그루 있다. 귀양지에서 옴짝달싹도 못하고 혹한을 맞고 있는 자신의 현실을 표현한 듯하다. 자신의 처지나 배경에 관한 이야기보다 소재가 된 소나무에 대해 관심이 더 가는 것이다.

 필기구가 먹이고 붓뿐이었던 때였다. 농묵 담묵으로 붓을 운용하다 보면 시서화는 자연스러운 여기로 되었을 터이다. 그런 생활이 익숙해지다 보니 필연으로 서체라는 것이 생겼을 것이고 품격이 어리게 되었을 것이 아닌가. 그 품격은 곧 예가 아닌가.

 허리 꺾인 소나무, 그것이 하고 싶은 이야기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면 누구나 개성을 생명으로 안다. 모방하는 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한다. 노송을 그리는 사람은 그 가지가 휘고 꺾이고 온갖 풍상 다 겪은, 그래서 어딘가 힘이 뭉치고 상처 입은 것들을 즐겨 그린다. 그렇다고 허리를 작신 부러뜨린 소나무는 완당의 <세한도>뿐이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발상이다. 상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가능한 것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것을 상상한다는 것은 망상일 뿐이다.

 무장 동헌에 가면 <세한도>의 소나무가 있다. 꼭 그렇게 허리가 부러진 소나무가 동쪽 언덕에 서서 더 늘어지지 않으려고 가지를 하늘로 향해 솟구치고 있다.

 무장현 선운사 주지 백파선사와 완당의 줄기찬 편지 싸움은 너무 유명하다. 싸움 구경은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가. 재미 삼아 사람들은 싸움이라 했지만 얼마나 깊은 우정을 엮어 나간 사이였겠는가. 당시의 고통과 형편을 생각한다면 여간한 정성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귀양지의 완당, 소나무를 생각하는데 무장 동헌의 소나무가 떠올랐을 터이다. 어쩌면 저렇게 생긴 소나무가 있을까 하고 바라보았던 소나무였는데 자기가 꼭 그렇게 되어 있지를 않은가. 목적이야 선운사 중님을 보러 갔지만 인사차 동헌에 들르는 것은 당시 선비들 사회의 예였을 터이다.

 감정이입의 세한도 소나무, 상상을 초월한 소나무다. 상상으로 꾸며낼 수는 없다. 상식을 벗어난 상상은 무리니까. 그렇다 모델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예술가의 감성으로 전이가 된다면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형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작품이 탄생한 현장이 중요한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미술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야 박물관에 가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환한 조명을 받는 그림도 어디서든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작품이 태어난 배경이 된 장소는 그와 또 다른 가치를 지닌다.

 고갱의 작품을 탄생시킨 타히티는 좋은 예이다. 남미의 이름 없는 작은 마을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그만큼 그림의 배경이 된 곳에 대한 관심이 깊다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경매 가격을 외쳐 봐도 그것은 장사하는 사람들의 관심일 뿐이다. 그림을 진정 아끼는 사람들은 생명감 넘치는 삶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이리라.

 완당의 붓자국은 다 명작이 되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 <세한도>다. 감정이입의 상태에서 작가가 심취하여 제작한 작품은 보는 사람에게도 감정이입이 이루어질 터이다. 보는 사람의 처지가 어떠하든 감성은 깊이 파고드는 것이리라.

 진동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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