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표
성적표
  • 김종일
  • 승인 2015.06.23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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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학기말 시험이 모두 끝났고, 다음 주면 학생들의 성적표가 발송된다. 어제 하루 종일 연구실에 앉아 채점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성적 저장 버튼을 클릭하는 것을 끝으로 퇴근했다. 오늘은 대학 성적표에 관한 얘기를 몇 자 적어 보기로 한다.

 중고등학교의 성적은 진학이라는 당면과제가 걸려 있어 절대적인 위치를 가지지만 대학 성적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학업을 마치고 이어지는 연구활동이나 사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창조성은 성적표에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원 학생을 선발하거나 연구원을 채용할 때 반드시 성적표를 꼼꼼히 보는 편이다. 지원자의 전문지식의 수준을 보고자 함은 아니다. C를 맞았든 A를 받았든 이제 대학 졸업한 학생이 알고 있는 수준의 지식은 사실 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적표에는 그 사람의 대학생활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사실 대학교수들은 학부학생들에 대해 잘 모른다. 대학원 학생이라면 석사나 박사 논문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자주 접하게 되고 깊이 있는 대화도 심심찮게 나누기 때문에 서로를 잘 알지만, 학부학생들의 경우는 자기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의 얼굴과 그 중 일부의 이름을 기억하는 정도이다. 특별히 연구실로 찾아오지 않는 이상 학부학생들을 개별적으로 만날 기회가 거의 없다. 학기가 끝나고 최종 성적이 나오면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을 떠올리면서 그 학기를 마감 짓는다.

 일단 먼저 보는 것은 평균점수가 되겠다. 하지만, 대학마다 편차가 커서 절대적인 기준이 되기는 어렵다. 개략적으로 평점 B이상이면 대체로 성실한 학생이고 그 이하면 나름의 사연이 있는 학생이라 보면 좋다. 그다음 보는 것은 학기별 성적의 굴곡이다. 매 학기 성적이 고른 학생이 있고, 오르락 내리락이 심한 학생도 있다. 후자의 경우라면 그 이유를 묻는다. 가정 문제인 경우도 있고 이성 문제일 수도 있고, 흔히 군입대 전후에 편차가 큰 경우를 본다. 또 성적이 꾸준히 오르는 학생이 있고 거꾸로 서서히 내려가는 학생도 있다. 역시 후자의 경우 학업에 관심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까닭을 묻는다. 생활 형편이 어려워 아르바이트에 시간을 많이 뺏기는 경우도 있고, 공무원 시험과 같은 다른 중요한 목표가 있는 경우도 있고 대답은 다양하다.

 마지막으로 눈여겨보는 것은 과목별 성적이다. 크게 전공과목 점수와 기타 교양과목을 나누어 본다. 전공이나 교양이나 성적이 비슷한 경우가 있고 둘 중 하나가 현저하게 높거나 낮은 경우가 있다. 전공 점수가 상대적으로 낮다면 그건 심각한 문제가 된다. 나름의 이유를 묻는다. 또 영어나 수학 점수를 특히 관심 있게 본다. 그 학생의 기초 실력을 말해주는 중요한 단서다. 성적표에 여러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것은 맞지만, 어찌 보면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북미나 유럽의 경우 성적표보다 추천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높다. 유명한 고위 인사의 추천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잘 아는 사람이 작성한 솔직담백한 내용일수록 좋다.

 성적이 나가고 나면 가끔 불만을 가진 학생들의 전화나 방문을 받기도 한다. 사연은 다양하다. 대기업에 조기 취업했는데 이번에 졸업 못하면 쫓겨난다는 하소연부터 암과 같은 중병, 어려운 가정 형편 또 각종 시험 준비 등으로 공부하기 어려웠다는 나름의 구구절절한 스토리를 풀어놓는 학생들도 있다. 집으로 쫓아와서 문을 두드리는 학생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실수나 착오가 아닌 경우를 제외하고 단 한 번도 성적을 조정해준 사례는 없다. 살아가면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 노력한 만큼의 대가가 주어진다.”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좋은 성적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답변을 주곤 한다. 개인적으로 매우 안타까웠던 사례도 몇 차례 있었다. 몇 년째 성적 재조정 문제로 찾아오는 학생이 없다.

 김종일<전북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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