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이야기 익산역
한국사이야기 익산역
  • 권익산
  • 승인 2015.06.18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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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호남선 KTX가 완전 개통되면서 익산역에서 서울까지 1시간이면 갈 수 있게 되었다. 익산역은 전북으로 들어오는 길목이고 익산역은 우리 근현대사와 함께한 역사이기도하다.

우리에게 철도의 역사는 일본의 침략과 함께 기억되고 있다. 제국주의는 기차를 타고 온다는 말이 있듯이 유럽인들은 오리엔트 특급을 타고 중동을 침략했으며,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만주와 한반도로 세력을 넓혔다. 또한 미국의 제7기병대는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아메리카 인디언을 학살했다.

일제가 조선에 서둘러 철도를 건설한 목적도 마찬가지였다. 러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경부선과 경의선을 서둘러 건설했으며, 기차를 타고 다니며 항일 의병을 공격하였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자마자 일제는 호남에 철도를 놓기 시작하여 1912년 강경-이리 구간의 개통을 시작으로 호남선 철도를 개통하였다. 동시에 군산-이리간 군산선 철도와 1914년 이리-전주간 경편철도가 놓였다.

익산역의 설치는 전북이 본격적으로 일제에 수탈당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철도를 통해 일본인들은 전북으로 몰려들었고, 일본 상품이 빠르게 전북에 퍼져나갔다. 반대로 전북의 평야에서 수확한 쌀은 이리역과 군산항을 거쳐 일본으로 실려갔다.

일제강점기에 익산역은 먹고 살길을 찾아 만주로 일본으로 떠나가던 조선인들을 바라보아야 했으며, 침략 전쟁의 총알받이로 일본, 중국, 남태평양으로 끌려가던 전북인들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봤을 것이다.

익산역의 수난은 해방이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자 미군은 천안과 청주를 잇는 방어선을 지키고 있었다. 전투가 한참이던 그 즈음이었지만 이리역은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별다른 혼란은 없었다. 그러던 1950년 7월 11일 오후 2시경 미군 B24폭격기 두 대가 익산역 하늘에 나타났다. 비행기에 새겨진 미군기 표시에 사람들은 북쪽의 전선으로 가는 비행기라 생각하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런데 그때 폭격기에서 새까만 폭탄이 쏟아져 나왔고 익산역과 그 주변은 쑥대밭이 되었다. 7월 15일 미군 전투기는 한차례 더 익산역을 공격하였다.

아직까지도 이날의 폭격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는지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전쟁 통에 벌어진 일이고 미군에 의한 폭격이라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던 가족들은 서둘러 시신을 수습하고 피난길에 나서야 했을 것이다. 다만 당시 피해자의 증언, 남아있는 기록, 익산역 부근 민가 50여 채까지 폭격을 당한 점 등을 종합해 약 4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민주화 이후인 1999년에 이르러서야 유족회가 조사를 시작하여 사망자 78명의 명단을 알게 되었으며, 익산역 광장 한쪽에 위령비를 세울 수 있었다.

7월 15일 또다시 미군기가 나타나 역 일대에 총격을 가한 것으로 보아 한국 지형에 익숙하지 않았던 미군이 이리역을 천안 부근의 북한군이 장악한 역으로 보고 공격한 것이 아닌지 추측해 보지만 미군의 공식적인 조사나 발표는 없었다. 설령 북한군의 진격을 차단하기 위한 불가피한 폭격이었다 하더라도 예고 전화 한통화만 했더라면 아군의 폭격에 무고한 민간인이 죽는 피해는 없었을 것이다.

익산역의 아픔은 전쟁 후에도 한차례 더 찾아왔다. 1977년 11월 11일 저녁 익산역에 정차해 있던 화물열차에서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불기둥이 솟았다. 40대 이상 어른들이 이리역 폭발사고로 기억하는 이 사건은 다이나마이트를 실은 화물열차가 역 구내에 정차해 있다가 호송원이 켜 놓은 촛불이 화약에 옮겨 붙으면서 폭발한 어처구니없는 사고였다. 화약 같은 위험 물질을 실은 기차는 역구내에 정차할 수 없다는 원칙은 무시되었고, 화약을 지키는 호송원은 술을 마시고 화약 상자 위에 촛불을 켜두는 등 여러 건의 안전 수칙 무시가 겹쳐서 일어난 사고였다. 화약 30톤이 한꺼번에 폭발한 이 사고로 역에서 근무하던 직원 16명을 포함하여 59명이 사망하고 7,873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당시 폭발은 익산역 반경 500m를 초토화시키고, 반경 2km 안에 있던 유리창을 모두 깨뜨리는 등 엄청난 규모였다.

식민지 시기 수탈의 도구로 시작된 익산역은 전쟁의 상처와 개발지상주의의 폐해를 딛고 KTX 시대에 새로운 교통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권익산 원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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