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메르스’
역사 속의 ‘메르스’
  • 임보경
  • 승인 2015.06.17 16: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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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에는 세월호 대사건에 국가 전체가 많이 힘들어하고 슬픔에 잠겨 있는 채 현재는 메르스라는 아주 무서운 공포의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을 공포의 분위기에 휩싸이게 하였다.

 이런 상황을 바라보는 국가와 백성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신뢰하지 못한 채 허우적대고 있음을 고발한다.

 우리나라 옛 설화에서 처용무의 유래를 살펴보며 메르스와같은 무서운 존재에 대해 우리 조상들은 시대마다 신분이 높든 낮든 처용무에 온 정성을 다한 역사의 시간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설화>에서 비롯된 가면춤 처용무는 궁중 무용으로 다섯 사람이 동서남북과 중앙을 상징하는 옷을 제각기 입고 처용 가면을 쓴 채 궁중에서 추는 춤으로 처용은 통일 신라 시대 9세기 후반 사람으로서 아내를 범하려던 역신(疫神 -전염병을 옮기는 귀신) 앞에서 자신이 지은 노래를 부르며 대범하게 춤을 춰서 귀신을 쫓아 버린 설화 속의 영웅이다. 처용이 이때 악귀를 쫓도록 만든 노래가 우리 민족의 고대 시가를 대표하는 ‘처용가(處容歌)’이고, 덩실덩실 추었던 춤이 ‘처용무’의 기원이라고 한다.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에 악귀를 쫓아내고 왕실의 평화와 백성의 안위를 기원하는 새해맞이 행사로 진행되었으며 그 후 처용무는 악귀를 몰아내는 의식을 넘어 궁중의 잔치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궁중 무용으로 변했다 한다.

 여기서 처용무가 말하고자 함은 종교적인 의식을 떠나 백성을 사랑하는 지도자의 간절한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낙타와 접촉하면 메르스에 걸리듯 1347년 이후 유럽에서도 쥐나 벼룩에 감염된 사람에게 전염되는 형태의 흑사병이 있었다. 많은 수의 사상자를 남겼으며 유럽 전역을 휩쓸고 간 흑사병! 이때 사망자가 유럽 전체의 삼분의 일(1/3)을 차지했다. 이 경우 피부가 흑색으로 변하기에 흑사병이라 부르게 되었고 의학적인 기술이 발달 되지 않아 환자의 격리나 청결을 유지하는 것이 유일한 대처방안이었다. 현재의 메르스 대처방안도 환자의 격리와 손을 깨끗이 씻는 정도이니 인간의 나약함만을 느끼는 현실이다. 페스트(흑사병) 역시 그 후 여러번 발생하면서 의학기술 또한 발달하면서 수습이 조금씩 되어가듯 현재의 메르스 또한 그와 비슷하리라 본다.

 조선시대에도 전염병이 전쟁보다 무섭게 유행하였다. 이 시대에도 역병이 유행하면 먼저 격리조치를 취하였다. 또한, 심한 경우라도 죽지 않게끔 죽 등의 음식을 공급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왕실에서도 귀신을 쫓아내기 위한 의식(처용무)까지 행해지기도 했다.

 이 시대의 역병은 콜레라, 두창(마마), 이질, 장티푸스, 홍역 등이었다.

 현대인에게 가장 무서운 질병은 무엇인가?

 진단과 동시에 사형선고를 생각게 하는 암일 것이다. 조선사회는 암이라는 병명보다 천연두라는 병명이 백성들을 가장 두렵게 하지 않았나 싶다. 그 당시의 백성들의 공포는 지금 메르스의 유행이 끼치는 영향과도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왕실이 베풀어준 은혜에 백성들은 감사했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공포심이 전국을 가득 엄습할 때 조선의 지도층 왕들은 어떤 대처방안을 세웠을까? 궁금하다.

 ‘조선의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내 탓이오. 꽃이 지고(가뭄) 홍수가 나고 벼락이 떨어져도 내 책임이오. 그게 임금이며 그 어떠한 변명도 필요없는 자리 그게 바로 조선의 임금이라는 자리이니라’세종대왕의 말씀 속에 세종실록에는 지방의 관리들에게도 성의를 다하여 치료하고 죽는 자가 나지 않도록 하여라. 하셨다. 그리고 백성에게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백성이 원하지 않으면 시행하지 않았으며 수용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소통하였다 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연스럽게 폭군으로 인식한 연산군일기에서도 ‘금년에 한양 안에서 사망한 백성이 많은데 이것은 분명히 흉년과 전염병으로 인하여 일찍 죽는 것이니 5부에 각각 의원을 정하여 병세에 따라 치료해 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뢴대로 따르되 만약 삼가 거행하지 않으면 죄를 다스려라’ 하였다 한다. 이 외에도 광해군, 숙종 영조, 정조 등의 왕들의 전염병 대처방안에서는 모두가 솔선수범하였음을 실록을 통해 엿볼 수가 있다.

 많은 업적을 남긴 왕이든 폭군이든 백성들 앞에서 머리를 숙였으며 전염병에 대해선 심사숙고하여 신중히 다루었음을 우리는 조선의 왕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역사가 주는 교훈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현대에도 많은 신종 바이러스가 시대를 거쳐 갔다. 현명하게 대처해온 지도층도 볼 수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번 메르스가 이렇게 사회적인 공포를 일으킬 정도로 커진 것은 정부 관련부처의 대응이 미숙했던 것으로 정부의 솔선수범과 공유함의 부재 즉 정부의 부재라 보며 유감의 말을 전할 뿐이다.

 임보경<역사문화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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