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소관
팔자소관
  • 김종일
  • 승인 2015.05.25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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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은 여자의 계절이요,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 했던가? 나이가 들다 보니 계절이 따로 없다. 꽃빛 바람에 실려 오는 진달래 향에도 시리고 시절을 다한 낙엽에도 아리다. 이렇게 시리고 아린 ‘나’라는 ‘자아’는 무엇인가? 철학자와 같은 인문학자들이 들으면 황당하겠지만, 최신 뇌과학 연구에 의하면 우리가 ‘나’라고 느끼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뇌 안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상태변화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뇌 안의 물질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 것들을 ‘나’라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나’라는 것이 없으니 당연히 ‘자유의지’라는 것도 없는 것이 된다. 정치적 선호나 종교적 신념 나아가 우리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착각이라고 한다. 흔히 사랑을 호르몬의 장난이라 하듯이 말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서운하고 자존심 상하는 얘기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물리학 이론으로 따져 봐도 자유의지는 설 자리가 없다. 물리학에서 삼라만상의 변화를 기술하는 두 개의 방정식이 모두 2차 미분 방정식이다. 고전역학에서 거시 세계를 다루는 뉴톤 방정식과 양자역학에서 미시 세계를 설명하는 슈뢰딩거 방정식이 모두 2차 미분방정식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2개의 초기 조건이나 경계 조건에 의해 완전한 해가 도출된다. 뉴톤에 따르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완전한 일대일 대응을 이룬다. 따라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이미 완전하게 결정되어 있다. 자유의지가 있을 수 없다. 한편, 슈뢰딩거에 의하면 현재와 미래가 일대일로 대응되지는 않는다. 현재 똑같은 상태에 있더라도 다양한 미래가 펼쳐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의지에 따르는 원하는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다. 따라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알 수는 없지만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을 확률적 결정론이라 부른다. 과학의 가장 큰 속성이 발전이고 이에 따라 훗날 전혀 다른 새로운 이론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현재까지는 ‘나’의 ‘자유의지’를 주장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

 17세기 세상의 운명이 모두 결정되어 있다는 뉴톤의 결정론적 세계관이 등장했을 때 당시 사람들은 육체(물질)와 정신을 구분하는 이분법으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는 탈출구를 찾았다. 하지만, 최근 뇌과학의 진전으로 과거의 이분법은 이제 무용지물이다.

 물리학 이론과 최근 뇌과학의 연구 결과가 맥을 같이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유물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자유의지’는 분명 없는 것이 된다. 물질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미 정해진 길을 걷고 있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도 이미 결정되어 있는 일일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은 타고난 유전적 정보 그리고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유물론적 결정론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어지럽다. 뇌과학에서 ‘나’는 그간의 경험들을 연결해주는 선이며 스토리라고 설명한다. 내가 존재하며 내 의지로 어떤 생각이나 행동을 한다는 사실이 모두 착각이고, 우리가 모두 태어나는 순간 이미 모든 운명이 결정되어 버린 자연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면 ‘삶’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뉴톤 이후 물리학의 역사가 3백여 년에 불과하고 뇌과학 연구도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로 판단하기에는 이를 수 있다. 훗날의 연구가 새로운 세계관을 열어주기를 기대해본다. 어느덧 들녘이 푸르다. 어쨌든 세상을 조금 더 너그럽게 바라볼 일이다.

 김종일<전북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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