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코 치고 나서
배코 치고 나서
  • 신형식
  • 승인 2015.05.11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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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식 교수
 며칠 전 5월1일 근로자의 날, 오래 생각해오던 이발을 단행했다.

 디-데이(D-day)를 궁리하던 참에 반대하는 마눌님이 그날 연휴를 맞아 오랜만에 전주를 방문하신 처형, 처제와 함께 무주리조트로 마실 나간 틈을 이용한 것이다. 이발이 무슨 대수냐고? 과감하게 많이 짤랐기 때문이다. 20대도 아닌 내가 소위 ‘스킨헤드’, ‘배코’를 친 것이다.

 ‘배코 친다’는 말은 우리 선조들이 상투를 앉히려고 머리털을 깎아 낸 것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 조상들은 상투를 틀 때 먼저 정수리 부근, 즉 상투를 앉힐 자리 주변의 머리를 깔끔하게 밀었단다. 배코란, 국어사전에 등재된 것은 아니지만 동양사상이나 한의학에서 정수리를 가리키는 백회(百會) 또는 백회혈이, 음운 변천을 일으켜 굳어진 말로 설명된다.

 이렇게 생겨난 내 스킨헤드를 두고 말들이 많은 걸 안다.

 앞에서 오래 생각해왔다고 했으나 그것은 스스로 용기를 끌어내기 위한 고민이었지 명분 때문이 아니었다. 중고교 시절, 또 군대 생활을 빡빡머리로 지냈지만, 그건 내 자의적으로 행한 일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그 후 40년 만에 환갑이 다 되어 삭발하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마눌님께 ‘버킷리스트(bucket list)’를 운운한 것도 기실은 나에게 한 자기최면 같은 것이었다. 그러다 덜컥 저지르고 보니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이제까지는 주변의 수상한 눈초리나 추궁을 애매한 웃음으로 얼버무렸지만, 오히려 차후 더 큰 오해를 부를 수 있겠다 싶어 이쯤에서 삭발 전후 오가던 상념을 해명 겸 정리한 것임을 밝힌다.

 세 가지다.

 첫째, 죽기 전에 한 번쯤은 내 머리 내 기분 내키는 대로 처분하고 싶었다.

 둘째,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반성의 몸짓이다. 살아남은 자로서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기성세대의 뒤늦은 비애와 고뇌의 표현이다. 나해철 시인은 작년 4월16일 이후 매일 한 편씩의 시를 써서 그들 영전에 바쳐왔다는데,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으로서 단 한 줄의 추도 글도 쓰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분노의 고백이다.

끝으로, 내가 십년을 두고 세 번 씩 도전했다가 실패한 전대 총장선거 관련이다. 망각하려는 내 노력 덕분인지 반년도 채 안 된 일이지만, 벌써 소싯적 일 만큼이나 관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일이 있다. 배신자들에 대한 섭섭한 마음이다. 잊으려고, 용서하려고 노력해도 안 되는 몇몇 사람들. 이제 그들에 대한 분한 마음을 내려놓고자 한다.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그냥 묻어두려는 것이다.

 독자제현들이여, 눈에 설혹 거스르더라도, 이 세 가지 이유로 결행할 수밖에 없었던 일쯤으로 양해해주시길 청한다.

‘앞으로 안 데리고 다니겠다.’는 마눌님의 으름장에 겁먹은 채 양키즈 야구모자 속에 머리를 묻고 학교에 나왔다.

 전북대학교 화학공학부 교수 신형식(시인,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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