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산의 한국사 이야기 : 노동절
권익산의 한국사 이야기 : 노동절
  • 권익산
  • 승인 2015.05.07 15: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5월 1일은 노동절이다.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의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제의 쟁취를 요구하며 총파업을 벌이다 6명의 노동자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을 계기 제정된 노동절은 5월 1일을 기념하기 때문에 MAY DAY라고도 부른다. 노동절은 1890년 처음 제정된 이후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과시하는 날로 기념해오고 있다. 당시에는 미국의 노동자들도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노동 환경,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었나보다.

우리나라에서 노동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이다. 전북의 경우에는 군산을 중심으로 노동자 계층이 일찍부터 형성되었다. 군산은 일본으로 쌀을 수탈해 가는 창구였기에 일찍부터 쌀과 관련된 각종 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이 공장의 주인은 식민지에서의 이윤을 노리는 일본인이었으며, 조선의 젊은이는 저임금 노동과 민족적 차별에 시달려야만 했다.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의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의 절반에 불과하였고, 여자의 일자리는 일본으로 가져갈 쌀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좋은 쌀만 골라내는 작업을 하는 미선공이 많았으며, 남자의 일자리는 정미소 인부나, 부두의 하역노동자가 많았다.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노동 조직도 만들어졌다. 1920년 서울에서 전국단위 노동 조직인 조선노동공제회가 조직되자 군산에도 바로 조선노동공제회 군산지회가 만들어 졌으며 군산 미선공 조합과 군산 정미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이들 노동 조직은 야학 등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 단결의 필요성을 알리는 등 일찍부터 계몽활동과 노동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노동 운동의 영향으로 일어난 최초의 파업 투쟁이 1924년 낙합정미소에서 일어났다. 군산의 거대 정미소들은 모두 일본인 소유였는데 이들은 이윤이 감소할 것 같으면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윤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안 그래도 저임금 노동과 민족 차별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던 노동자들이 낙합정미소 측이 일방적으로 80%의 임금을 삭감하려하자 임금 인하 반대를 요구하며 파업 투쟁을 벌인 것이다.

파업으로 정미소는 멈추었지만 낙합정미소 사장 오치아이는 노동자들의 대화 요구를 무시하였다. 사장은 오히려 지게벌이 노동자와 점원 등을 동원하여 정미소를 돌리는 한편 파업을 풀지 않으면 조선인 노동자를 대신해서 중국인 노동자를 데려와 정미소를 운영하겠다고 협박하였다. 이에 파업 노동자들은 기존 임금의 90%를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하는 한편 정미소를 습격하여 파업 노동자들을 대신해 일하던 인부들을 쫓아냈다. 그러자 일제 경찰은 이 사건을 핑계로 파업 노동자 40명을 구속하여 파업을 무력화 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인근 노동자들까지 동참하면서 파업이 확대되자 결국 노동자들이 제시한 안이 받아들여지고 구속된 노동자도 석방되면서 군산 최초의 파업은 승리할 수 있었다.

당시의 여론은 원인은 정미소 주인이 임금을 삭감하여 동맹파업을 한 것인데 주인은 새 사람을 고용하여 일을 시키니 처음에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싸움이 나중에는 노동자와 노동자의 싸움을 일으킨 것이라. 가난한 사람의 피를 빨아 먹다가 나중에는 가난한 사람을 이용하여 서로 못살게까지 하는 극악무도한 자본가의 횡포를 보고도 태연히 지나가는 소위 당국자는 무엇이라 할까? 악한 자를 미워한다면 당국자도 또한 악한 자가 아닐까? 라고 하면서 일본인 사장과 사장을 편드는 일제 경찰 당국을 실랄하게 비판하였다.

군산의 노동자들은 그 후로도 일본인 정미소에 대한 투쟁을 계속하여 1926년에는 군산 정미소 1,000여명의 노동자가 동맹 파업을 하여 승리하였고, 1930년 조일정미소 미선공 파업, 1934년 가등 정미소 미선공 파업 등을 통해 일본인 자본가의 민족 차별과 지배에 꾸준히 저항하였다.

조선에서 노동자의 파업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임금 삭감 같은 공장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대하여 생존권을 지키려는 저항이이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동안 꾸준히 이어진 조선인 노동자들의 저항은 더 낮은 임금을 주고 더 많은 이윤을 확보하여 일본의 번영을 이루려는 식민지 정책의 뿌리를 흔들었다는 점에서 민족의 독립을 앞당기는 저항운동이기도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