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가의 문장
법률가의 문장
  • 나영주
  • 승인 2015.04.09 16: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사’(假使)라는 말이 있다. 한자와 병기하지 않으면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무슨 의미일까. ‘가정하여 말하면’이라는 뜻이다. 익숙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가령’ 정도 되겠다. 국어사전을 펼쳐보면 10번째 의미로 적혀 있을 만큼 일상생활에서는 자주 쓰이지 않는다. 요즈음은 많이 쓰임이 줄었지만, 판결문이나 법률 서면에는 종종 등장한다. ‘가사’와 같은 생소한 단어가 아니더라도 법조계 특유의 ‘표현’이 있다. 예를 들면 ‘~에 터잡아’, ‘~에 대한 관계’, ‘~에 대항하여’ 같은 표현이 그것이다. 개인적으로 ‘~에 대한 관계’라는 표현을 볼 때면 마치 시나 소설에서 ‘그(그녀)와의 관계’라는 표현이 떠올라 살짝 두근거리기도 했었는데, 실제 쓰임새는 별로 낭만적이지 않다. 법률문서에서는 흔히 ‘채권자에 대한 관계’ 정도로 쓰이기 때문이다. 채권-채무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그다지 낭만적일 것 같지는 않다(물론 다른 의미에서 채무자는 채권자를 생각하면 두근거릴 수도 있다). 이 표현 또한 ‘a connection to’라는 영어표현에서 비롯된, 번역의 냄새가 나는 부정확한 표현이다.

 사실 어느 분야든 그 분야 특유의 표현들, 이른바 ‘업계 용어’가 있고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분야일수록 그러한 경향이 심한 편이다. 기자들이 쓰는 ‘야마’(기사의 주제나 핵심을 의미)라는 일본식 조어도 그렇고, 의사들의 의학용어야 두말할 나위 없다. 특히 법원의 판결문은 그 문체나 단어 쓰임새가 일본어투인 것은 둘째치고라도, 엄청나게 긴 만연체로 악명이 높다.

 법원도 이러한 문제점을 깨달았는지 오래전부터 판결문을 순한글로 작성하도록 판사들에게 권고하고 있고, 검사나 변호사들도 마찬가지로 서면의 단어나 문체를 법률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 간결한 표현으로 바꾸고 있다. ‘법은 상식이 정장을 입은 것’이라는 영국의 격언처럼, 사실 법률문서는 그 내용부터 상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표현 방식 또한 쉽고 간결하게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광복 이후, 고유의 법률체계를 만들지 못하고 불가피하게 독일이나 일본의 법을 계수(繼受, 이어받는다는 뜻. 사실 이 단어도 법학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다)를 한 역사 때문인지 몰라도, 법률문서는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표현 또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다른 분야의 지인들이 가끔 내게 우리 법원은 왜 미국의 법원처럼 근사한 판결문을 쓰지 않느냐고 묻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우리 법원도 멋진 문장이 담긴 판결문을 많이 낸다고 답하곤 하지만, 사실 판결문의 문장은 이를 접하는 일반인들에게 다소 생소하고 딱딱하게 비칠 소지가 있다. 법률문서는 그 특성상 무미건조하기 때문이다. 주어와 동사, 가끔 부사 정도만 들어가는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형용사는 전무하다. 흔히 이와 같은 문장 구성은 소설가 김훈이 많이 쓴다고 하는데, 법률문장은 함축적인 표현이 많은 김훈의 문장과 형태는 유사해도, 함축적이기보다 의미가 선명해야 하기에 차원을 달리한다. 법은 철저하게 이성의 영역이고, 소송은 객관적인 증거의 싸움이기에 어쩔 수 없다.

 법조인으로 접해본 가장 설레는 판결문 구절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들에게 개인적으로 항상 소개하는 판결문이 있다.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항 등 위헌제청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문 중 재판관 김진우, 이재화, 조승형, 정경식의 의견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 반란행위자들 및 내란행위자들의 군사반란죄나 내란죄의 공소시효완성으로 인한 법적 지위에 대한 신뢰이익이 보호받을 가치가 별로 크지 않음에 비하여 이 법률조항은 위 행위자들의 신뢰이익이나 법적 안정성을 물리치고도 남을 만큼 월등히 중대한 공익을 추구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중략)…. 우리 헌정사에 공소시효에 관한 진정소급입법을 단 한 번 예외적으로 허용한다면 바로 이러한 경우에 허용하여야 한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경우가 진정소급입법의 원칙적 금지의 예외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그 예외는 대체 어디에 해당하고 무엇을 위한 예외인지 진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 만들어진 법률의 처벌조항으로 그 법률이 없었던 과거의 범죄를 처벌할 수 없음은 우리 헌법의 대원칙이다. 그렇지만, 예외가 있다. 위 재판관들은 그 예외에 대하여 위와 같은 빛나는 문장으로 설명하고 있다. 통찰력 있는 역사인식과 헌법에 대한 철학에 터잡은 위 문장에 대한 관계에서 나는 언제나 대항할 수 없다.

 나영주<법률사무소 신세계 대표 변호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