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백석제 문화제적 가치 없어
군산 백석제 문화제적 가치 없어
  • 이복웅
  • 승인 2015.04.09 16:0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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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현강역사문화연구소 이우형소장이 백석제가 1300년대 축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군산 백석제와 관련된 문헌자료 인`여지도서'를 증거로 제시했다. 이와 함께 시민단체에서는 한발 나가 역사적 고증과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정사에 의한 문헌을 제시하지 않은채 `옥구지도',`야은선생속집'에 나타난 기록만 가지고 군산 백석제를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해야 한다고 기자회견을 가진바 있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고려시대 저수지인 백석제가 료화제라는 주장은 증거가 부족하고 더불어 국가지정문화재로서는 그 가치가 부족하다는 견해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밝히고자 한다.

 첫째, 이 소장이 주장하는 `옥구군지'와 `여지도서'등 지방편찬 역사서에 기록된 저수지였음은 맞다. 그러나 백석제는 `여지도서'이전의 정사 즉 `세종지리지'(단종2년·1454년),`동국여지승람'(성종12년·1481년),`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25년·1530년),`동여비고'(숙종8년·1682년경),에는 기록을 찾을수가 없다.

 이와 반면에 옥구현의 미제지와 임피현의 호산제는 앞에서 열거한 역사서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어 오히려 정사의 기록에 없는 백석제 보다 역사적 연대가 앞서고 규모나 크기에 있어서 보존될 만한 가치가 더 크다고 볼수있다. 따라서 백석제 문화제 지정 추진은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다.

 둘째, 야은 길재의 문집에 나타난 료화제가 백석제라는 주장 역시 근거가 부족하다 료화제라는 지명은 야은 길재의 개인 문집에 등장하는 명칭으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통털어 군산(옥구, 임피, 회현)의 어떠한 문헌에도 등장하지 않는 지명이며 특히 군산 문화원에서 발간한 `우리고장지명유래'에서도 확인 할 수 없는 명칭으로 지명의 전승 및 전래의 특징을 살펴 볼때 료화제라는 지명이 실존했다면 어떠한 경로를 거쳐서라도 전래해 내려왔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구전과 기록이 전무 하여 백석제가 료화제라는 지명은 그 증거가 희박 할 수 밖에 없다.

 셋째, 예외적으로 일제 강점기인 1933년에기록된`염의서원지'에서 백석제를 료화제로 비정하는데 있어`염의서원지'는 염의서원에서 배향하는 고용현이 얼마나 큰 학자인지를 야은 길재의 명성을 빌러 증명하려는 목적성을 지닌 글로서 이러한 사례는 다른 조선시대 문집이나 서원지에서 흔히 확인 할 수 있는데 사실의 유무를 떠나 고려시대 문집에 기록된 지명을 일제강점기에 백석제라는 지명과 동일시 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넷째, 미제지를 기록한`세종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동여비고',`대동여지도',`조선후기지도'등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수많은 지도서에서도 백석제와 료화제는 찾을수가 없다. 따라서 역사적 고증이 부족한 백석제는 그나마 1945년 저수지 개축작업으로 말미암아 전통적 저수지의 원형이 훼손 돼 있어 문화재적 보존 가치는 부족하다고 볼수 있다.

 끝으로 문헌자료로 제시한`여지도서'는 1757년에서 1765년에 걸쳐 각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만든 필사본 읍지다. 그러나 이`여지도서'는 수록 되지 않은 전라도,경기도,충청도에서 39개읍지가 누락되었고 전라도에서는 임피현,만경현를 비롯한 16개읍과 전라지도,전라총론등이 빠져있는 책으로 각지역을 파악하는 기초적인 자료이다.

 이복웅<(사)군산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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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제 2015-04-23 16:56:42
선생님께서 아는 지식이 백번 맞다고 치고요...그러니 백석제는 깔아 뭉개자고요?
글쎄요 2015-04-10 01:13:28
1차적으로 이미 역사적가치에 관하여 논쟁이 시작되었다는것 자체만으로 병원설립지역으로는 무리가 있어보입니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제 3의 장소가 차라리 나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