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인가?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인가?
  • 이동희
  • 승인 2015.04.07 17: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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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지도하는 문예교실에 늦깎이로 문예 공부하는 노부인이 계시다. 어느 날 우연히 그분의 시집살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참혹했을 젊은 시절을 술회하는 부인의 눈가에 저절로 이슬이 맺히는 듯했다. 그분의 삶-시집살이가 얼마나 고되었을지 감히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그분의 정서에 공감이 가는 대목이 있었다.

 어느 날 시모께서 그러더라는 것이다. “네 시할머니가 얼마나 지독하게 날 들볶아댔는지 아느냐? 아 글쎄 내가 마흔여섯에 애 지우고 정신을 놓고 있는데 네 시할머니가 그러더라. ‘쥐새끼는 새끼 가질 때는 찍찍 소리는 내도, 새끼 내지를 때는 찍소리도 없는데, 저년은 애는 소리도 없이 가지더니 애 지울 때는 저렇게 유세를 떨어 쌌느냐?’ 내가 그런 시집살이를 한 사람이다.”라는 말과 그때의 섬뜩했던 심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면서 “시집살이 당한 사람이 더 가혹하게 시집살이시킨다는 옛말 그른 거 없다”고 술회하였다.

 이런 경우는 본인이 당한 고통과 설움을 고스란히 되갚아주겠다는 심리가 작용한 결과이리라.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정작 본인이 당한 사람됨의 작용이 자신도 모르게 후대에 전해지는 것이다. 집단생활을 하는 군대사회의 선임이나, 합숙훈련을 하는 단체운동의 선배들이 후임이나 후배들에게 가하는 폭력과 폭행이 끊이지 않는 것도 ‘시집살이’ 원리에서 멀지 않을 것이다. 되게 맞아보고 당해본 선참-선배가 후임과 후배에게 앙갚음의 심리가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홍준표 경남지사가 초·중학생들의 무상급식[무상급식이 아니라 의무급식이요 세금급식이 맞다]에 소용되는 예산을 배정할 수 없다며 황당한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지 밥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다”, 정부의 지원을 받으려면 “가난을 증명”하라며 학부모들과 학생들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가난의 천형을 대못으로 박고 있다. “국민들로부터 욕먹는 정치인도 필요하다. 내가 그런 정치인이 되겠다.”며 마치 시대의 투사처럼 설쳐대는 모습에서 시집살이 당한 시어머니가 더 한 시집살이시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홍준표 지사는 가난한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점심 도시락을 싸올 수 없어서 수돗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는 대목에서 그의 성장과정의 가난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내가 가난했어도 열심히 공부하여 이만큼 성공하였으니, 너희도 가난을 핑계 대지 말라”는 독기서린 시어머니의 앙칼진 앙갚음의 정서를 읽어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T.홉스는 <리바이던>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본성에는 불화의 세 가지 주된 원인이 있는데, 첫째는 경쟁심, 둘째는 자기 확신의 결여, 셋째는 영광에 대한 욕구가 그것이다.” 인간들은 무엇을 얻기 위해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명성을 얻으려고 서로를 공격한다. 이때 ‘영광에 대한 욕구’가 가장 주요한 원인이라고 말한 이는 S.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는 이 [영광에 대한]욕구는 일종의 사회적 거절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애정에 대한 요구’로 다시 명명된다고 하였다.(P.시프테 <10명의 사상가들>) 애정에 대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에 불과한 존재가 될 뿐이다. 애정에 대한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 인간은 인간에게 인간일 수 있다.

 요체는 ‘영광에 대한 욕구’가 너무 큰 권력은 ‘애정에 대한 요구’를 외면함으로써, 가난을 천형으로 대못 치기를 서슴지 않는다. 늑대가 되느냐, 사람이 되느냐는 순전히 자기 확신에 의한 사랑[애정]의 요구에 응답하는 길 밖에 따로 있지 않다. 이 무상한 세월 앞에서 밥 한 그릇의 힘만도 못한 권력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늑대가 아니라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변화(變化)가 아니라 변용(變容)이 되어야 가능하다. 사람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세월 따라, 감정 따라, 형편 따라, 손익 따라 시시때때로 변화한다. 변화는 외형이며 기회며 처세라는 이름으로 명명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 때나 변용되지는 않는다. 내면의 가치에 의해서, 쉽게 저버릴 수 없는 진리에 의해서, 손해 보아도 좋을 사랑의 감정에 의해서 변용될 뿐이다. 변화가 아니라 변용되어야 시어머니가, 고참이, 선배가, 권력자들이 늑대가 아니라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이동희<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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