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사랑을 그려내는 것
그림은 사랑을 그려내는 것
  • 진동규
  • 승인 2015.04.05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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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를 가꾸는 사람이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바람이 일어 꽃이 피어나게 한다. 새들로 하여 둥지를 짓게 한다. 안개처럼 부드러운 둥지에서 알을 품어 어린것들을 길러내게 한다.

 말이 없는 사람, 한마디 언질도 없이 자신이 가꾼 대학의 묘목장으로 나를 이끌었다. 승용차의 뒷좌석을 앞으로 눕히게 하여 짐칸을 넓히고는 “이것도 하나, 이것도 하나.” 묘목장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골고루 챙긴 나무가 짐칸을 그득 채웠다. 꽃집에서 쉽게 구하기 어려운 나무라는 것을 안 것은 얼마나 뒤의 일이었다.

 층층나무, 물푸레나무, 쪽동백, 산딸나무 깊은 산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나무들이다. 그러니까 내 고향집 뒷동산을 깊은 숲으로 만들어 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말씀으로는 어찌어찌 전해줄 수 없는 숲이 나누는 이야기들을 선물하고 싶었던가 보다.

 지난여름은 층층나무와 물푸레나무 가지에 해먹을 맸다. 해먹 위에 누워 바라보는 건넌 산은 내가 아침저녁으로 보던 산이 아니었다. 노루궁둥이쯤의 꽃방석, 춘란을 키워내는 산만이 아니었다. 꿩알만 품어내는 산이 아니었다.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세상의 구도를 연출하고 있지 않은가.

 층층나무는 산발치 아재의 회문산 골짜기에나 들어가야 만나는 나무다. 그림 잘 그리는 아재, 그 그림 솜씨로 회문산에 가 수령님 얼굴이나 그리다가 살아 나온 아재, 쥐새끼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포위망을 발자국 하나도 남기지 않고 빠져나왔다는 아재, 아재가 산발치인 것은 아무도 몰랐다.

미륵산 미륵사 불전에 탑을 짓듯이 층층이 꽃숭어리를 벙글게 하여 꽃탑을 이루어 내는 나무다. 깊은 산 속에 호사스러운 이름은 어색할지도 모른다. 층층으로 꽃을 피워내는 나무, 아재나무 층층나무.

 물푸레나무는 도리깨를 만들 만큼 단단한 나무다. 도낏자루, 짜구 자루를 만든다. 그렇게 단단한 언약의 나무이기도 하다. 둘만의 영원한 비밀을 새기는 데 이 나무를 쓴다. 물푸레나무를 삶아 사용한다. 사찰에서는 스님들의 승복을 만드는 데 최고의 염료로 꼽힌다. 검은색만이 아닌 푸르스름한 기운이 돋는다. 보통 3미터쯤 자라는 나무인데 우리 뒷동산에서는 9미터, 10미터를 넘게 자랐다.

 쪽동백은 꿀이 특별한 나무일시 분명하다. 꽃철에는 나무가 온통 벌통이 되어 버린다. 꽃숭어리가 포도송이 늘어지듯 하여 꿀단지 노릇을 하는 것인가? 꿀단지가 아니면 벌들이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게 할 만큼 매혹적이 향이나 맛을 지녔는지도 모른다.

 이 나무들이 내 뒷동산에 온 것이 십수 년이 지나고 보니 이제는 숲이 되어 있다. 강진하 교수는 나에게 숲을 안겨준 사람이 아닌가.

 출판사에 들렀다가 강 교수를 만났다. 정년퇴임이란다. 기념 논문집 교정을 보러 온 것이었다. 숲이 된 나무 이야기를 했다. 그때 그 나무들은 전설 같은 이야기를 무성하게 만들고 있는데, 정년기념 논문이라니.

 내 고향집을 찾는 사람은 강 교수의 나무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 한 편에 쪽동백 향을 그윽이 담아 갈 터이다. 층층나무에 매어 놓은 해먹에도 누워 만나 보지도 못한 강 교수를 떠올려 볼 것이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이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던가. 그림은 사랑을 그려내는 것, 좋은 그림은 따뜻한 이야기를 만들면서 스스로 더 아름다워지지 않던가.

 진동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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