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內的) 풍요에서 오는 ‘일탈’의 감동
내적(內的) 풍요에서 오는 ‘일탈’의 감동
  • 박재천
  • 승인 2015.03.12 14: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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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근래 들어 내 마음에 ‘일탈’에 대한 화두를 새롭게 던져주었던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내가 음악을 하는데 동기를 부여해줬던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전설적인 싱어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 얼마 전 중요무형문화재 고법보유자로 지정된 김청만 명인, 그리고 송하진 도지사님 이 세분이다.

 나는 로버트 플랜트가 록그룹 레드 제플린 안에서 오로지 본인의 노래만 몇십 년 부르며 명성을 유지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놀라운 이야기를 알게 됐다. 재즈의 고장인 뉴올리언스의 한 재즈페스티벌에 참가해 그의 새로운 프로젝트팀과 함께 조명하나 없는 대낮 공연의 무대에 섰다는 것이다. 더 이상 예전에 유행하던 나팔 백바지, 가슴을 풀어헤치고 장발을 휘날리며 불렀던 그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칠십이 다 된 로버트 플랜트의 재즈페스티벌에서의 공연은 나에게 충격적인 일탈로 다가왔다. 로버트를 제외하곤 모두 바뀐 새로운 멤버들과 심지어 아프리카 민속 악기를 두드리는 모습이라니. 참으로 보기 좋았고 자기 것만을 주장하는 독선에서 벗어난 그 풍요로움과 여유는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작년 겨울, 명인시리즈의 마지막이었던 인천 공연을 마치고 김청만 선생님께 장황한 설명과 함께 이런 부탁했다. “타악기 연주자끼리…, 저도 나름대로 국악에 대해 공부하고 전통 장단에 대해 알고 있으니… 내년 초에 타악기 듀오로 앨범을 같이 만들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김청만 명인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why not?” 나는 쾌재를 불렀고 바로 두 달 후인 1월 27일, 서울 모처에서 녹음을 진행했다. 어떤 조건도, 어떤 바람도, 어떤 요구와 연습도 없었다.

 “그저 자네도 두들기고 살고 나도 치고 살았으니 우리가 만나면 되는 것 아닌가? 오히려 연습하면 재미없네.”

 한 시간 삼십분 동안 진행된 녹음은 모든 것이 레코딩됐고, 나는 곧 이 앨범을 ‘레코드&레코딩(Record&Recording)’이라는 타이틀로 제작해 내놓을 계획이다.

 지난해 한창 개막공연을 준비하고 있을 당시, 7월 1일 자로 부임한 송하진 도지사님께 전주세계소리축제 프로그램과 내용에 대해 보고할 일이 있었다. 이미 ‘청Alive‘와 관련한 모든 시나리오와 음악 구성, 하드웨어 시스템과 스태프 등을 모두 완성해놓은 터라 조금이라도 바뀌게 되면 상황이 무척 혼란스러울 거라는 생각에 조바심을 내며 보고를 드리던 터였다.

 “이십대 젊은 소리꾼들로 구성됐고…, 새로운 영상기법의 도입과…” 나는 장황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송하진 도지사님은 단 한마디로 내 이야기를 일축했다. “예술의 행위는 때로 일탈일 때가 재밌지 않나요? 나는 이번 ‘청Alive’가 판소리의 또 하나의 일탈이라고 생각합니다.”

 허를 찌르는 ‘촌철살인’에 역시나 나는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청Alive‘는 2014년 호불호가 갈리는 가운데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치고 올해 서울과 전주 앙코르 공연을 계획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왜 하는가. 가진 자들의 여유, 그리고 한 삶을 올바르게 살아온 사람들의 풍요로움,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온 ‘일탈’. 이것을 즐거워하고 자신이 줄 수 있는 하나의 ‘공헌’으로 생각하며 주저 없이 시도해 온 사람들의 이야기다.

 나 어렸을 적, 내가 일하던 나이트클럽에 가수 이미자 씨가 전격 출연하던 날이었다. 갑자기 정전이 됐고, 준비한 모든 음악은 순식간에 멈춰 섰다. 불빛이라고는 웨이터를 부를 때 치켜드는 촛불뿐이었다. 그때 이미자 씨는 주저하지 않고 객석 한복판으로 내려가 통기타 한 대의 연주에 맞춰 ‘동백아가씨’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삼십 명이나 되는 빅밴드를 갖추고 준비를 했지만, 오히려 통기타 하나와 합을 맞춘 ‘동백아가씨’는 그 어떤 공연보다 더 큰 감동을 주었다.

 20여 년 전, 미국의 훌륭한 싱어인 토니 베넷(Tony Bennett)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했을 때, 그는 많은 곡들을 연주한 끝에 모든 음악을 멈추고 큰 무대의 끝자락까지 걸어 나왔다. 마이크도 들지 않고 어떤 반주도 없는 가운데 그는 혼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훌륭한 반주와 좋은 음향 시스템을 통해 듣는 소리와는 다른, 숨죽이듯이 모두 귀를 기울여야 했던 그의 중후한 목소리와 노래는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였다.

 나는 올해 14회 전주세계소리축제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계획한 많은 예술가들이 기존의 레퍼토리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을 떠나, 관객들에게 어떤 일탈을 선보이며 흥미와 감격을 느낄 수 있는 무대를 선사해줄지 기대한다. 내 것, 내가 했던 것과 아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만 동원해서 옹색함 속에 그것을 잘 치러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일상에서 벗어난 새로운 구성을 통해 관객들에게 진정한 감동적인 일탈을 선사할 수 있는 주인공은 누굴까.

 일탈을 깨운 분들, 그리고 그 일탈을 누릴 수 있도록 준비한 많은 분들. 이것이야말로 퓨전시대를 살며 억지로 짜내어 만들어 내는 부조화가 아닌, 그저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풍요로움과 여유로움, 고즈넉함과 소박함 속에서 들려주는 감동이 아닐까.

 박재천<전주세계소리축제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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