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한천에 향을 터뜨리는
섣달 한천에 향을 터뜨리는
  • 진동규
  • 승인 2015.02.16 18: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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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납매가 벙글었다. 예부터 눈보라를 뚫고 찾아오는 손님처럼 반가운 꽃이라고 했다. 노란 꽃잎이 투명하리만큼 해맑은 빛이다. 향 또한 맑아서 꽃봉오리가 그대로 해맑은 향주머니다. 꽃송이를 따 꽃차를 우려내는 것은 그 향 때문일 터이다.

 납매는 그해의 맨 마지막 달, 온 들의 곡식이며 과일들을 다 거두어들이고 나무의 잎사귀들까지도 다 져버린 한천에 꽃을 피워낸다. 그해의 마지막을 차리는 향이 그윽하기만 하다. 장엄하다는 말을 여기에 덧대도 될까? 생명이라는 것의 지극함이 훈훈하므로 온다.

 팔공산 숲길을 헤매다가 작은 암자에 들러 점심 공양을 대접받은 일이 있었다. 절에서 만들었다는 차를 나누다가 스님은 백지 한 장을 가져왔다.

 “처사님께 화두를 드리겠습니다.”

 비구의 노스님께서 백지 위에 ‘장엄성’이라는 세 글자를 적으셨다. 산문을 접해본 일이 없던 처지여서 순간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몇 년이나 세월이 흐르면서 문득문득 그 말씀을 떠올리곤 했다. 문 듯이 가슴이 뜨거워 오던 날이 있었다. 스님을 뵈어야 했다. 내가 다시 스님을 찾았을 때는 스님은 계시지 않았다. 열반에 드셨다고 했다.

 며칠 전에 소설가 정연희의 에세이를 대한 일이 있었다.

 “몽롱했다. 영혼이 너울너울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저승인가… 하늘인가… 다시는 깨어나고 싶지 않은 몽롱함이었다. 사람도 없고 소리도 없고 오직 향기뿐이었다.

 그런데… 이 향기가 어디서 오는 향기…?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고 물었다. 아! 사과나무 향기예요. 과실수는 해마다 전지를 해야 하거든 가을이면 사과나무를 전지하고 그렇게 잘라낸 가지가 많아 그걸 벽난로에 때는데 그 향기가 아주 괜찮지. 사고나무는 열매만 주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잘린 가지로 향기를 선사하는 신비한 나무야.”

 무성한 잎의 푸른 엽록소가 생명의 햇살을 맞이하면서 서로 뜻이 잘 맞아서 꽃 빛을 만들어내고 향기를 또 퍼뜨리게 되는 것이려니 라고만 생각했다. 사각사각한 과일의 육질이며 꽃보다 더 진한 향기를 또 그렇게 만드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사과나무의 뿌리가 캄캄한 땅속 어디에서 그토록 그윽한 향기를 끌어낸다는 말인가. 사과나무가 제 잔가지 하나까지 저승인가… 하늘인가… 몽롱하리만큼에 향기롭게 키워낸다는 말인가.

 나무들은 서로 각기 다른 제 꽃들을 피워낸다. 제 꽃의 향기를 가꾸어낸 것이 아닌가. 미나리를 데쳐내면 꽃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향을 또 품어내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달래, 냉이, 꽃다지 나물 바구니의 작은 나물들 하나하나가 다 제 향들을 가지지 않았던가.

 고향집 뒷산에 소금 나무가 있다. 가지 끝에 치렁치렁 숭어리로 된 열매들이 하얗게 분가루를 흠뻑 쓰고 있다. 소금이다. 멧짐승들이 이 나무에서 소금을 얻어간다고 한다. 이 나무는 어디까지 뒤져서 소금을 찾아내는 것일까. 몇천, 몇 만 년쯤 전에 이 산이 바닷속이었던 때가 있었던 것이고 그러고 또 몇 번인가 뒤집히면서 짠물을 뒤집어써 온 것이 아닌가. 그걸 찾아내어 시집가는 제 씨 숭어리에 분으로 바르다니!

 섣달 찬 하늘에 향을 터뜨리는 납매만이 아닌가 보다. 들길에서 만나는 작은 풀꽃들의 지극함은 어디까지이던가.

 진동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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