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고즈넉한 고택에서의 하루
[설] 고즈넉한 고택에서의 하루
  • 김미진 기자
  • 승인 2015.02.13 16: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족 최대 명절인 설이 다가왔다. 모처럼 온 가족이 한데 모여 정을 나누고, 조상을 생각하는 의미 있는 날이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온 가족, 친지, 친구들과 행복한 추억을 남길 수 있는 곳이 어디 없을까 분주하게 찾고 있다면, 이곳을 주목하자. 한국인의 삶과 문화, 가치관 등이 어우러진 쉼터가 가까이에 있다. 바로 고택(古宅). 전주의 ‘학인당’, 익산의 ‘삼부자집’, 정읍의 ‘김동수 가옥’ 등은 꼭 가봐야 할 명소 중의 명소다. 세월의 흔적으로 일부의 경우 낡기도 했고, 방치된 흔적도 여럿 보이지만, 곳곳에 천하를 호령했던 부농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규모와 흔적들을 찾는 재미는 쏠쏠하다. 그리고 이내 고즈넉한 돌담을 따라 걷다 보면, 분주하고 고단했던 도시의 생활은 잠시 내려놓게 된다. 세상사 아무런 욕심 없는 선비가 된 듯 편안한 걸음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 이만한 힐링 또한 없지 않을까. <편집자 주>
 

 △백범 김구 선생이 묶은 곳으로 유명한 전주의 ‘학인당’
 
 서울 북촌에 윤보선 고택이 있다면 전주한옥마을에는 학인당(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8호)이 있다.

 학인당은 한옥마을에 있는 700여 채의 한옥 가운데 격식을 갖춰 지은 지 100년 된 대형 한옥이다. 조선왕조 붕괴 후 궁중건축양식이 상류층 가옥에 도입된 전형적인 예로 당시의 상류층 주택의 전형을 보여준다.

 학인당은 건축 당시에는 99칸 집 2천 평 규모의 대저택이었으나, 지금은 대지 520평에 건물이 69평 정도가 남아있다. 당시 일류 도편수나 목공 등 연인원 4천280명이 압록강, 오대산 등지의 목재를 사용해 2년 8개월에 걸쳐 건축했다고 전해진다.

 이 집은 조선 고종 때 효자로 소문난 인재 백낙중의 사후를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그의 호 중 ‘인(忍)’자를 따서 ‘학인당(學忍堂)’이라고 했고, 솟을대문에는 ‘백낙중지려(白樂中之閭)’라 쓴 현판을 걸어 놓았다.

 학인당은 지난 1970년대 용인민속촌에 이 집을 통째로 옮기기 위해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거액을 제시하며 2차례나 팔기를 권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또한, 백범 김구 선생이 묵어간 곳으로도 유명하다.

 전통문화체험장으로 개방된 학인당에서는 한옥체험숙박(단, 구정연휴 기간인 18일~20일은 휴무)도 가능하다. 위에 부담이 가지 않는 소박한 조반을 제공하고, 전통다례체험도 가능하다. 차 한 잔 여유와 휴식을 즐기며 고택에 얽힌 사연들을 듣는 즐거움이 크다.
 

 △익산 함라산 둘레길에서 만나게 되는 ‘삼부자집’
 
 예로부터 함라지역은 곡창지대로 매우 풍족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함라마을’은 교동, 안정, 수동, 천남, 행동, 감마 마을을 포함하는데, 수동마을은 조선시대 함열현의 중심지로 관아가 있던 곳으로 고택들도 많다.

 특히 소문난 부잣집들이 많았는데, 만석꾼으로 알려진 임천조씨 집안의 조해영 가옥, 김해김씨 김안균 가옥, 수동마을 바로 옆인 천남마을에 있는 경주이씨 집안의 이배원 가옥을 묶어 삼부자집이라고 칭한다.

 수동마을에 먼저 정착한 집안은 임천조씨 집안이다. 그 중 조해영 집안은 일본 강점기에 농장을 운영하면서 부를 이뤘다. 조해영 가옥(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은 건립될 당시에만 해도 ‘열두 대문 집’이라 불릴 만큼 많은 건물이 있었지만 가세가 기울면서 헐리거나 해체되어 팔리고 현재는 몸채·부속채·별채만 남아 있다.

 그 다음에 정착한 집안은 김해김씨이다. 현재의 김안균 가옥(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23호)은 전북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익산에 남아 있는 고가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양호한 건물로 평가된다. 조선 후기 양반가 형식을 취하고 있어 당시 주택구조를 살필 수 있다. 긴 행랑채를 갖고 있는 이 집을 마을 사람들은 김진사 댁이라고 부르는데, 인심도 넉넉해서 일대 백리안에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배원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아 1925년 당시 함열면 와리에 삼성농장을 설립하여 부를 확장했고 1918년에 이배원 가옥(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37호)을 지었다. 이 집을 모델로 김안균 가옥과 조해영 가옥을 건립, 평면의 구성에서도 서로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는 여러 채였으나 모두 헐리고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다. 사랑채는 내부가 개조돼 원불교 교당으로 활용되고 있다.

 무엇보다 수동마을의 진짜 매력은 옛 담장이 아닐 수 없다. 담장 둘레만 300m가 넘는다는 김안균 가옥 뒤편으로 돌아 마을 안쪽 골목길로 가면 진짜 옛 담장을 만날 수 있다. 담장은 토석담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토담, 돌담, 전돌을 사용한 담 등 다양한 형태의 담이 함께 있다. 수동마을의 옛 담장은 2006년에 등록문화재 263호로 지정됐다.
 

 △전형적인 배산임수를 이루고 있는 명당 ‘김동수 가옥’

 강릉 선교장과 함께 조선시대 사대부 가옥의 전형적인 특성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정읍 김동수 가옥(중요민속자료 제26호)을 꼽는다. 흔히 아흔아홉 칸 집이라고 부르는 상류층의 가옥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고택은 김동수의 6대 할아버지인 김명관(1755~1822)이 조선 정조 8년(1784)에 지은 집이다. 앞에는 동진강의 상류가 서남으로 흐르고 있고, 뒤편에는 해발 150여m의 창하산이 둘러 있어 풍수지리에서 명당이라 말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를 이루고 있다.

 김동수 가옥에 들어서기 전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문 밖의 호지집이다. 호지집은 호외(戶外)집이라고도 하는데, 집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소작농들이 살던 집이다. 집 주위에는 8채의 호지집이 있었으나 지금은 2채만 남아있다고. 대가집을 둘러싼 이러한 초가집들은 사대부의 입장에서는 도적이나 외적의 침입을 지연시키는 방어선 역할을 하기도 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건물들은 행랑채, 사랑채, 안행랑채, 안채, 별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마당과 바깥행랑채가 있고 바깥행랑의 동남쪽에 있는 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문간채가 있다. 사랑채 서쪽으로 ㄷ자형의 안행랑채를 배치하였는데 그 앞쪽으로 ㄷ자 평면을 가진 안채가 있다. 안채는 좌우 대칭을 이루게 지어 좌우 돌출된 부분에 부엌을 배치하고 있는 특이한 평면을 갖추고 있다. 안채의 서남쪽에 있는 안사랑채는 김명관이 본채를 지을 때 일꾼들이 기거했던 곳이라고 한다.

 소박한 구조로 되어 있으나 건립자의 독창성을 엿볼 수 있는 이 가옥은 후세에 보수되거나 개조되지 않고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어 건축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좋은 연구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김미진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