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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사색당파 분쟁과 한국의 여야계파 싸움
황병근 성균관유도회 전라북도본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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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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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여당인 새누리당과 대표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내 계파간의 당권쟁탈전이 이전투구가 되고 당의 명운과 국리민복은 안중에도 없고 계파의 이익과 일신의 영달에만 매몰되어 사생결단하는 추악한 모습을 보면서 조선조 중기이후 음모와 참소로 피투성이가 되었던 사색당파의 당략적 분당사를 더듬어 볼까한다.

1575년(선조8년)에 인사권의 요직인 전랑직(銓郞職)을 둘러싸고 권세가였던 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과 신진사류인 김효원과의 대립반목에서 빚어진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 탄생했다. 김효원이 도성 동쪽 건촌동에 살고있어 동인이라 칭했고 심의겸이 서쪽 정동에 살고있어 서인이라 했다.

 동인의 사상적 배경은 주리철학(主理哲學)에 입각한 영남학파(領南學派)인 퇴계 이황의 제자였고 서인은 주기철학(主氣哲學)을 존중하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인 율곡 이이의 문인이다. 율곡은 동서분당을 막기위해 노력하여 분쟁을 막는듯 했으나 1584년 율곡이 별세하자 동인세력이 강화되어 집권하게 되었으며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인 기축옥사로 정권을 서인에게 물려주게 되었다.

서인인 좌우정 정철은 1591년 광해군을 세자로 천거하려다 동인의 영의정 이산해의 술책에 말렸던 건저문제로 파직되고 명천에 유배되고 말았다. 동인이 서인들에 대한 유혈숙청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정철에 대한 치죄(治罪)문제로 사형을 주장하는 과격파인 이산해 이발 주도의 북인(北人)과 귀양을 보내자는 온건파인 우성전 유성룡 영도의 남인(南人)으로 분당되었다. 북인은 1599년 홍여순이 대사헌으로 임명되자 정랑인 남이공이 반대함으로써 이산해 이이첨 등이 영도하는 대북(大北)과 남이공 김신국 등이 이끄는 소북(小北)으로 분당되었다.

소북을 몰아내고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하여 집권한 대북은 영의정 이산해와 병판 홍여순 사이에 알력이 생겨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골북(骨北)과 홍여순을 중심으로 한 육북(肉北)으로 분파되고 영창대군 인목대비의 폐위를 반대하는 유몽인을 수령으로 한 중북(中北)이 탄생했다.

소북은 유영경이 영의정에 올라 영창대군의 세자옹립을 추진하다가 실패한 뒤 영수격인 남이공과 유영경 사이에 틈이 벌어져 남이공파의 청소북(淸小北)과 유영경파의 탁소북(濁小北)으로 분당되어 대북세력이 광해군시대를 지배했으나 인조반정으로 끝나고 소북은 일부가 서인과 남인에 흡수되고 효종 현종때에는 남인과 운명을 같이했다.

남인은 한때 정권을 잡았으나 조식의 문하인 북인 정인홍이 유성룡을 탄핵하여 사직케 한 다음 집권을 했으나 이때 서인은 남인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영입함으로써 남인과의 연합세가 주도하였으나 차차 남인과 서인과의 유대관계가 이완되었다.

효종 현종때에 이르러 남인은 서인에게 대항하기 위해 소북의 잔당을 규합하여 남인 서인간의 대립형국이 이루어졌다. 숙종때에 효종의 상(喪)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服喪)문제, 즉 1659년 기혜예론이 일어나 이 정쟁을 계기로 서인이 물러나게 되고 남인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때 서인에 대한 처벌의 경중을 놓고 허적이 대표하는 온건파인 탁남(濁南)과 허묵이 이끄는 과격파인 청남(淸南)으로 분당되었다. 탁남과 청남은 다시 노론과 소론과의 정쟁을 위하여 남인당으로 통합하였으나 경종이후 조선말기까지 남인 집권기는 도래하지 않은채 정계에서 배척되어 고향에서 후진양성에 전념하며 동인세력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서인세력은 창당이후 1589년 정철이 국옥(鞠獄)을 주관한 기축옥사를 통해서 동인세력을 추방하고 잠시 집권을 했으나 1591년정철이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주청하도록 음모를 꾸민 영의정 이산해의 꾀임에 말려들어 신성군을 세자로 삼으려했던 선조의 분노를 사게한 건저문제(建儲問題)에 걸려 삭탈관직되어 정권을 동인에게 물려주었다.

야당으로 일관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집권하게 된 서인세력은 영의정 김류 등이 이끄는 반정공신파인 공서(功西)와 김상헌이 주도하는 청서(淸西)로 갈라지고 다시 공서는 김류가 북인 남이공을 대사헌으로 등용하려할 때 반대하는 나만갑 등의 소장파는 소서(少西)로 지지하는 김류 부자와 신흠 등의 노장파는 노서(老西)로 분당됐으나 인조때는 서인천하였다. 인조말 사림을 대표하는 송시열 등을 중심으로 산당(山黨)이 조직되고 권력지향적인 김육 중심의 한단(漢黨)이 생겼으며 원두표의 원당(原黨)과 김자점의 낙당(洛黨)이 분당되어 서인은 사분파되었다.

 효종이 등극한 뒤 송시열이 다시 정계에 등장하면서 스승인 김장생의 문인중심으로 서인을 재규합했으나 1680년에 남인세력을 축출한 경신환국 후 남인치죄의 경중을 놓고 대립되고 송시열과 그 제자인 윤증과의 불화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당되어 동인의 남인, 북인 등의 사색당파 정쟁이 전개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했으나 1694년 갑술옥사로 소론파가 집권하게 되고 그 후 남인세력은 사라지고 서인세력에 의해 좌우되었다. 1762년 사도세자 사사사건으로 노론파는 시파(時派)로 소론파는 벽파(僻派)로 분파되어 정조때는 시파가 득세했다. 1801년 신유박해를 계기로 시파인 소론이 몰락하고 노론의 독주시대가 조선 말까지 지속되었다.

얼마전에 막이 내린 여당의 원내대표 선거와 야당의 당대표 선거가 끝난 자중지난이 겉으로는 봉합된 듯 싶으나 골이깊은 내종(內腫)은 아직도 독이 잔뜩 올라있는 듯 싶다. 조선조 사색당파의 당리당략에 사로잡혀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사는 식의 사생결단하는 동물적인 정쟁이 아닌 살신성인과 공선사후(公先私後)로 애국애족하는 진정한 목민(牧民)정치의 참모습을 보고싶다.

 황병근<성균관유도회 전라북도본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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