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실업문제에 대한 소견
청년 실업문제에 대한 소견
  • 이한교
  • 승인 2015.01.27 15: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금 우리에겐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일들이 산적해 있다. 그중 하나가 청년 실업 문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동안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난 청년 실업률은 역대 최고치(9%)를 기록했다. 문제는 앞으로 더 많은 대가를 지급한다 해도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극약 처방으로 병을 다스리다 보니 이제 어지간한 약으론 효과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번 정부에서도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청년 실업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지만, 그대로 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런 불신은 근본적인 대책은 무시하고, 임기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올리려는 욕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또한, 정권이 바퀼 때마다 늘 새로운 정책에 대한 실패는 무책임으로, 시간과 천문학적인 예산 낭비는 무감각으로 받아넘기는 일이 일상이 된 까닭이다. 여기다 청년실업이 전 세계적인 추세라는 점에 실패를 크게 자책하지 않은 면도 있다.

  물론 세계경기가 좋아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정부의 노력을 깎아내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동안 중장기 실업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청년실업해소 특별법’등을 제정하고, 청년미취업자 또는 청년재직자의 직업능력개발훈련을 시행했지만, 기대만큼 실효를 거두지 못한 것은, 세계 경제가 한 톱니바퀴에 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우리만 노력한다고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다만, 대기업만을 찾다가 시간을 낭비하고, 지쳐서 무기력감에 빠지고, 사회·국가에 대한 냉소와 분노의 수위가 높아지는 청년들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는 얘기다.

  뒤돌아보면 우리나라는 1980년대 후반부터 경제가 고도로 성장되면서 1990년대 초엔 극심한 인력난을 거치게 된다. 이 심각성은 당시 신문기사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다. ‘高卒 시대가 온다’‘企業, 實業高 출신 모셔오기 競爭’‘자격증시대 大學生 부럽잖다’는 등의 내용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빈둥거리는 靑少年 많다’ ‘生産 勤勞者 이직률 늘어’‘大企業 전문인력 스카우트’‘技能人力 이대론 안 된다’는 등의 기사가 나오더니 곧바로 극약 처방으로 ‘임금 싼 東南亞 인력 대량 수입 檢討’란 말에 국민이 크게 반발했지만, 1991년 11월 ‘해외투자 기업 연수생제도’ 도입을 시작으로 외국인 근로자가 들어오고, 이어 IMF를 맞게 되면서 제조업의 해외 이전이 가속화 되었다. 그러자 국내 일자리는 줄었고, 제조업을 중심으로 외국인 근로자 도입규모는 점점 확대(2015년 5천5백 명 도입 확정)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필자는 지난 25년을 기회를 놓친 시간으로 본다. 이를 직시하지 못하고 지금도 좋은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동분서주하는 정부에게 묻고 싶다. 그 기준이 무엇인지,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일명 3D 산업을 나쁜 일자리로 보고, 그리고 대기업을 좋은 일자리로 보았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세상엔 나쁜 일자리란 없다. 대부분 외국인 근로자가 근무하는 3D 업종을 필요한 일자리로 만들면 좋은 일자리라고 본다. 그러기 위해선 왜 중소기업을 꺼리는지 그 원인 해결에 고민하면 된다. 이미 그 해답으로 낮은 임금, 불안한 고용, 취약한 작업환경, 미약한 복지혜택과 시설에 그 원인이 있다고 나와 있다. 이는 당연히 기업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윤 극대화를 목표로 삼는 기업이 앞장서서 해결하리라 보는 국민은 없다. 그래서 국민은 정부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많은 학자가 정부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위해 제도를 대폭 개선하고, 기능공 우대정책 확산을 통하여 기술과 땀의 가치를 높이는데 투자하고, 80%에 육박하는 대학 진학률을 50% 이하로 끌어내려야 청년 실업문제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게 될 거라는 지적에, 필자도 의견을 같이한다. 다시 말해 정부는 기업의 현장 애로를 경청하고, 고졸 취업자가 우대받고, 아무나 갈 수 있는 대학은 낭비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인디언들이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祈雨祭)를 지내 성공한 것처럼 말이다.

  말이 쉽지 농작물이 타들어 가고, 옆에서 피붙이가 굶어 죽어가는 데도 흔들림 없이 비가 내릴 때까지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엔 분명히 많은 갈등과 좌절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 지도자를 모함하고 해치려 하는 집단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식솔들을 보면서 도적질하는 무리, 전쟁으로 약탈하면 된다고 선동하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디언의 지도자는 무모하게도 비가 내릴 때까지 제사를 지냈다. 한두 번 해보거나, 시험 삼아 해보고 잊을만하면 해본 게 아니라. 반드시 이뤄내야 할 일이기에, 그 지도자는 원칙과 일관성을 가지고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자신은 굶어도 먹을 것을 양보하고, 궂은일을 도맡아가며 함께 희생했을 것이다. 아마 우리 지도자들처럼 싸움만 하면서, 이렇다 할 비전이나 희망을 제시하지 못했다면 그들 역시 성공하지 못했을 거란 소견이다.

 이한교<한국폴리텍V대학 김제캠퍼스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