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문화와 감정노동
‘갑질’문화와 감정노동
  • 김형준
  • 승인 2015.01.22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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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적, 사회적으로 사건사고도 많았던 연말연시 분위기에 사람들 입에서 가장 많이 회자한 이야기 중 하나가 ‘갑질’이라는 단어인 것 같다. 일명 ‘땅콩회항’으로 불리는 모 재벌 상속녀의 국가적 망신이 된 ‘갑질’부터 백화점에서 판매원의 무릎까지 꿇게 한 ‘백화점 갑질모녀’까지 갑을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이 이제는 하나의 문화처럼 되어 버린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사람과 사람 간에 ‘인정’을 중시되던 전통적 가치는 사라지고 ‘갑’과 ‘을’이라는 계약관계가 우선시 되면서 경제적, 사회적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상대방의 인격마저도 지배해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갑’들의 ‘질’은 비단 이번 몇몇 사건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외에도 라면이 익지 않았다고 승무원을 폭행한 ‘라면상무’, 대리점 점주들을 분노케 한 ‘남양유업사태’, 인턴이라는 이유로 급여를 착취하는 ‘열정페이’ 등 후진국적인 ‘갑질 문화’는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인권국가라 자부하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모든 인간은 그 존재만으로 충분히 존중받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다는 인권의 기본 원칙으로 되돌아봐야 할 때인 것 같다.

 한편, 이런 ‘갑질 문화’와 함께 또 하나 주목받는 문제가 바로 감정노동에 대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갑’들의 횡포에 웃으며 대응할 수밖에 없는 웃픈(?) ‘을’들이 바로 대표적 감정노동자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감정노동이란 실제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는 무관하게 직무를 행해야 하는 근로 형태를 일컫는 말로, 이러한 직종 종사자를 감정노동자라 한다.

  A. 러셀 혹실드 캘리포니아 주립대 사회학과 교수가 <감정노동(The Managed Heart)>이라는 저서를 통해 처음 언급한 개념으로, 혹실드는 육체와 정신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정까지 상품화하는 혹독한 현대사회의 단면을 감정노동이라는 말로 표현한 바 있다. 은행원ㆍ승무원ㆍ전화상담원처럼 직접 고객을 응대하면서 자신의 감정은 드러내지 않고 서비스해야 하는, 배우가 연기하듯이 직업상 속내를 감춘 채 다른 표정과 몸짓으로 손님을 대하는 직종으로 보통 감정관리 활동이 직무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이처럼 감정노동을 오래 수행한 근로자의 상당수는 이른바 스마일마스크 증후군(smile-mask syndrome)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 이 증후군은 밝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얼굴은 웃고 있지만, 마음은 우울한 상태가 이어지거나 식욕 등이 떨어지는 증상을 말한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억누른 채, 자신의 직무에 맞게 정형화된 행위를 해야 하는 감정노동은 감정적 부조화를 초래하며 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이를 적절하게 해소하지 못하는 경우 좌절, 분노, 적대감 등 정신적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겪게 되며, 심한 경우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와 같은 정신질환 또는 자살로 이어질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어떤 노동관련 학자가 지금은 ‘감정노동의 시대’라고 표현할 정도로 사실 현대 사회에서 모든 근로자는 일정 부분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일을 하게 된다. 얼마 전 엄청난 화제를 남기고 종영된 ‘미생’이라는 드라마에서 전쟁터 같은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아픔을 숨긴 채 버터 나가는 상황을 많은 직장인들이 나의 이야기 같다며 공감했다고 한다.

  이처럼 감정노동의 문제는 몇몇만의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라 정신건강과 올바른 직장문화를 만들기 위해 이제는 사회가 관심을 갖고 노력해야 할 과제이다. 이런 감정노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업주는 근로자의 감정을 일방적으로 희생해야 하는 혹독한 업무 매뉴얼을 합리적으로 개선해야 할 것이다.

  일정 한계를 넘어서는 악성 고객인 경우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닌 단계별 대응 매뉴얼을 만들고 한계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그리고 감정노동 종사자들의 업무량과 근무시간을 적절히 조절하고 정기적인 휴가시간과 휴게실 등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실제 정신적 스트레스와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직원을 위해서 개인 혹은 집단 심리상담 프로그램 등을 활용하는 것도 좋은 해결방법이다.

 갑과 을은 다양한 이해와 욕구가 충동하는 현대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지는 피할 수 없는 계약관계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계약상의 이해관계가 상대방의 행복을 침해하거나 인격을 무시할 권리까지 포함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와 의무가 있다. 행복을 연구하는 긍정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나 혼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찾아 함께 살아가는 가운데 얻어지는 것이라는 말하고 있다. 내가 존중받고 싶다면 먼저 존중하라! 이것이 행복이라는 즐거운 감정을 느끼는 방법임을 명심하자.

김형준<신세계병원 정신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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