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발이 비치면 설레는
눈발이 비치면 설레는
  • 진동규
  • 승인 2015.01.15 15: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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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운사 골짜기로 황토방 하나 얻어들었다. 한 며칠 눈이 내릴 것 같아서였다.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발을 엮어서

 각시방 영창에 걸어 놓아요
 

 참 아름다운 노래다. 동요지만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도 더불어 즐겨 부를 만한 노래다. 수정발을 엮어서 각시방 영창에 걸어주고 싶은 것이다. 이미지라는 것은 이렇게 선명해야 한다. 각시가 누구인가, 꽃 각시다. 꽃보다 더 예쁜 각시다. 고드름이 수정발로 엮어지는 각시방이다.

 고드름은 볕 좋은 처마에만 열린다. 각시방은 우렁 속 같은 각시네 옹실옹실한 꽃말이 엮어내는 고드름이 아니던가.

 고창 사람들은 ‘고창’을 ‘눈창’이라고 바꿔 부른다. 그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다. 뻘 우는소리는 눈 내리는 밤을 더 깊은 밤으로 이끈다. 눈 짓는 소리가 되어서 쌓인 눈을 더 쌓이게 한다. 그렇게 눈창이 되는 땅이다.

 고향집은 눈이 많은 중에서도 깊은 산자락 끝에 지은 집이다. 마을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집이어서 멧갓의 온갖 날짐승 들짐승과 함께 지냈다.

 새들의 종류가 다양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만큼 서로 활동하는 시간들도 다르다. 자기들끼리 나누는 울음소리가 다른 것이다. 들에 나간 소들의 밭갈이가 끝나는 어스름에 우는 머슴새의 소몰이 소리로 시작하면 밤새도록 이어지는 새 울음소리가 다르다. 대숲에 남은 어둠을 걷어내는 참새떼들의 울음소리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문드시 잠이 깨이는 밤이라도 잠깐씩 들리는 새 울음소리는 밤이 얼마만큼 깊어졌는가를 일러주는 것이다.

 달이 지금 뒷산의 어느 골짜기쯤 건너고 있는지를 알려 준다. 북두칠성이 밤하늘의 잔별들을 어지간히 퍼 나른 지를 또 알려준다. 멧짐승들의 자잘한 시름까지 퍼 나르다가 제 바가지의 손잡이를 묶은 칡넝쿨까지 잃어버린 것도 일러주는 것이다.

 눈이 푹푹 쌓인 밤으로는 고라니, 꿩 두세 마리 내 방문 앞 마루 밑을 찾아들었다. 잠자리를 지을 줄 모르는 놈들이다. 내 방바닥을 덥힌 따뜻한 연기가 동쪽 마루 밑을 통과해 토방 끝의 굴뚝에서 끝나는 것을 아는 놈들이다. 멧토끼처럼 땅굴 하나도 팔 줄 모르는 것들이 골짜기의 바위틈 바위굴은 언감생심 제 천신이 될 수는 없었을 터이다.

 놀란 것은 나였다. 새벽잠에서 깨어 무심코 방문을 열었는데 놈이 방문 앞 마룻장을 치받으며 튀어나와갔던 것이다. 필시 놈은 혼곤한 새벽잠 속이었을 터이다.

 내가 깨어 일어나는 기척도 못 느낄 만큼 단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덜컹거리는 방문을 열어젖힐 때에야 머리를 짓찧으며 달아나지 않았던가. 누가 먼저 놀랐건 미안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날부터 소변 행사는 내가 참아내기로 했다. 고라니가 새벽 꿈을 털고 나갈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할 수밖에 없었다.

 꿩도 제 집이기는 마찬가지다. 텃밭 결명자밭 귀퉁이에 알을 품었던 놈이다.

 어찌어찌 텃밭에 잡초가 짙어져 버린 것은 내 게으름 탓이었다. 손을 좀 볼 요량으로 갔는데 까투리가 바로 앞에서 푸드덕 날았던 것이다. 내가 가까이 갈 때까지 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풀을 잡는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텃밭에 물을 주는 일까지 삼가야 했다. 제 가슴의 털을 다 뽑아서 알 품을 자리를 만드는 꿩이다. 일곱 마리 새끼를 종종종 이끌고 나갔다.

 눈발이 비치면 설레는 것을 어쩌랴. 흰 눈밭에 고라니 발자국 꿩 발자국이 선하다.

 진동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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