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제실박물관과 대한민국의 국립박물관
대한제국의 제실박물관과 대한민국의 국립박물관
  • 유병하
  • 승인 2014.12.25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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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우리나라 박물관의 역사는 이미 100년을 넘어서고 있다. 1909년 11월 1일에 문을 연 대한제국의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을 기점으로 삼았을 때가 그러하다. 하지만 곧바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제실박물관은 비운의 대한제국과 함께 점차 사람들에게 잊혀져갔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그중에서도 일제강점기에 제실박물관의 역사가 어떻게 이어졌는지, 1948년 12월에 정식으로 문을 연 국립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과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원래 제실박물관은 1909년보다 이른 시기에 건립될 가능성이 있었다. 1882년 일본에 수신사(修信使)로 파견되었던 박영효(朴泳孝, 1861~1939)가 새로운 교육 및 학술문화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처럼 제실박물관의 설립을 고종(高宗, 1852~1919)에게 건의한 바 있었다. 그러나 급변하던 국내외 정세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 채 1907년 순종황제가 즉위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였다. 즉 순종황제가 즉위한 이후 1908년 1월부터 박물관 설립을 전제로 궁중에서 소장하고 있던 유물 이외에 새로이 도자기, 금속유물, 구슬 등을 대대적으로 수집하였고, 그 유물들을 토대로 기존의 궁궐 건물을 그대로 활용한 최초의 박물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당시의 제실박물관은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체제 아래에서 ‘이왕가(李王家) 일가의 취미 제공과 조선의 고미술(古美術)을 보호 한다’는 목적 하에 일본인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과 이완용, 이윤형 형제가 주관하였다는 오점을 남겼지만, ‘백성과 함께 즐기겠다’는 순종황제의 ‘여민해락(與民偕樂)’ 정신이 반영된 대중박물관으로 본격 출발하게 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더욱이 근대 박물관으로써의 면모를 과시하기 위해 당시로써는 거금인 30만환을 들여서 새로운 박물관 건물을 설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일합방에 따라 대한제국의 제실박물관은 1910년 12월 30일에 새로 설립된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으로 건물과 소장품, 직원이 그대로 인계되어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왕가의 세입과 세출을 담당하던 직원 7명이 근무하면서 매주 목요일은 순종(純宗, 1874~1926)을 위해 휴관하였으나 순종이 붕어(崩御)하신 이후에는 연중무휴로 개방하였다. 그리고 새로 지은 본관(本館)과 경복궁 내의 여러 전각(殿閣)에 불상과 도자기, 옥석기(玉石器), 목죽제품(木竹製品)을 분산하여 전시하였다.

그런 상태로 오랫동안 운영되던 이왕가박물관은 1938년 6월 5일에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으로 또 한 번 변신하게 된다. 당시 일제는 일본 미술품이 많이 전시되던 덕수궁 석조전 옆에 조선 미술품을 전문으로 하는 신관(新館)을 짓고, 창덕궁에 있던 이왕가박물관의 소장품을 옮겨와서 덕수궁 석조전의 소장품과 합쳐 새로이 이왕가미술관을 발족시켰다. 즉 기존의 제실박물관 소장품에 새로 수집된 조선의 미술품과 일본의 근대미술품이 합쳐진 박물관이 된 것이다. 여기에는 고고학 발굴유물을 토대로 황국사관(皇國史觀)을 추구하던 조선총독부박물관과 구분하여 순수 미술품 위주의 박물관을 지향한다는 목적을 앞세웠다.

당시 사무실과 수장고, 강당으로 사용되던 1층에는 전시실이 없었고, 2층에는 신라,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토·도자기가 전시되었고 중앙의 홀에는 대형 불상과 동종(銅鐘)이 전시되었다. 그리고 3층에는 신라, 고려시대의 각종 기와와 공예품, 불상 이외에 조선시대의 공예품과 회화가 집중적으로 전시되었다.

한편 1945년 해방 이후에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본격적으로 ‘국립박물관’이 태동하게 되었다. 미군정의 후원 하에 김재원 박사는 서울의 조선총독부박물관 본관(本館)과 부여, 공주, 경주에 있던 분관(分館)을 동시에 접수하였고, 약 4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친 후 1945년 12월 3일에 새롭게 단장된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그런 상태로 박물관이 임시 운영되다가 정부 수립과 함께 1948년 12월에 국립박물관의 직제(職制)가 공포되면서 정식으로 국립박물관이 출발하게 되었다.

그 무렵에 제실박물관의 소장품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던 이왕가미술관은 ‘덕수궁미술관’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관리는 국립박물관이 아닌 구황실재산사무총국과 그 후신인 문화재관리국이 맡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는 1969년까지 지속되다가 소장품 15,000여점이 모두 국립박물관으로 이관(移管)하게 되었다.

그 계기는 혹독한 전란(戰亂)을 겪은 국립박물관이 1956년 6월 23일에 덕수궁 석조전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찾아왔다. 덕수궁이라는 동일 공간에서 활동하던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덕수궁 내의 석조전과 일제가 지은 신관-은 1969년 5월에 정부의 명령에 따라 관리가 모두 국립박물관으로 위임하게 되면서 제실박물관의 소장품 전부와 이왕가미술관 시절부터 소장되었던 조선의 미술품, 일본의 근현대 미술품이 모두 국립박물관에서 통합 관리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일제강점기와 복잡한 해방 정국, 한국전쟁이라는 혼돈기(混沌期)에 박물관의 건물은 그 자체가 상징적인 존재라는 특성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건축물로서의 박물관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그다지 의미를 찾기 어렵다. 오히려 소장품을 기준으로 살펴보는 것이 타당한데, 이러한 관점에서 제실박물관의 소장품은 온전히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제실박물관은 대한민국의 국립박물관으로 온전히 그 맥이 이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유병하 <국립전주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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