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의 장편소설 허삼관 매혈기
위화의 장편소설 허삼관 매혈기
  • 김효정
  • 승인 2014.12.22 15: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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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의 명랑한 소설 관람> 34.

 언제부턴가 TV예능 프로그램에서 아빠들의 육아기가 대세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아빠 어디가’에서 출발한 아빠들의 육아예능은 점점 비슷한 부류의 프로그램을 양산해 내더니 요즘은 삼둥이 ‘대한, 민국, 만세’와 아빠 송일국의 인기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뜨겁다.

 1970년대에 태어나 1990년대 학번의 X세대들이 아빠가 되면서(일명 X대디) 이러한 프로그램과 아빠들의 양육 문화가 자연스럽게 만들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자란 요즘 X대디들은 전통 가부장적 사고방식을 지녔던 그들의 아버지 세대와는 다른 가치관으로 한국의 새로운 아버지 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들은 일보다는 가족, 먼 미래보다는 현재에 충실하고 ‘좋은 아빠’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강하지만 무조건적인 희생보다는 가족과 보다 많은 것을 공유하는 수평적 관계를 유지한다.

 이런 세상에서 피를 팔아 가정을 지켜가는 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등장했으니 이 무슨 경악할 노릇인가. 영화배우 하정우가 감독과 주연을 맡아 내년 1월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허삼관>의 원작 <허삼관 매혈기>의 주인공, 바로 ‘허삼관’이다. 중국의 대표 작가 위화의 작품 속 허삼관은 굴곡진 역사의 길 위에서 한평생 가족을 위해, 먹고 살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피를 판다.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 중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을 배경으로 생사공장 노동자 허삼관은 피를 판 돈으로 마을에서 제일 예쁜 허옥란과 결혼하고 일락, 이락, 삼락 삼형제도 낳아 가정을 이룬다. 그리고 오십칠일 간 옥수수죽밖에 못 먹은 식구들에게 국수를 사 먹이기 위해, 농촌 생산대에서 피골이 상접해 돌아온 일락이에게 용돈을 쥐어주기 위해, 이락이네 생산대장을 접대하기 위해 허삼관은 피를 판다. 궁핍의 시간들 속에서 피를 팔아야만 하는 아버지 허삼관의 삶이 무척 고단하고 안타깝게 느껴지려는 순간, 소설은 결코 궁상맞지 않고 호쾌하게 허삼관의 매혈기를 다룬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고통스러운 장면에서조차 익살과 해학을 잊지 않고, 웃음과 눈물의 경계를 오가는 동안 시대를 관통하는 작가의 시각과 그 시대를 함께 살아 온 사람들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가 가슴을 울린다.

 이 작품의 또 하나의 미덕은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삶일지라도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잃지 않는 진솔한 휴머니즘에 있다. 큰아들 일락이가 자신의 아들이 아님을 알게 된 허삼관은 애증의 눈길로 일락이를 보지만 결국 말없이 일락을 품는다. 일락이를 등에 업고 욕을 바가지로 하면서도 국수를 사 먹이러 승리반점으로 향하는 허삼관. 그는 결국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일락이를 위해 가장 많은 피를 팔며 아버지로서, 인간으로서의 최대치를 보여준다.

 평생을 불평등과 싸우며 평등을 추구했던 허삼관이지만 그 평등의 세상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온 몸으로 느끼며 그 운명을 기꺼이 감수한다. 그리고 그러한 허삼관에게서 크고 작은 삶의 위기 속에서도 아버지로서의 자리를 지키며 가족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을 본다. 그것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는 ‘부정(父精)’의 보편성이며, 결코 세대를 구분 지을 수 없는 공통분모이기도 하다.

 친구 같은 아빠 X대디도, 보수적인 가부장적 아버지도 자식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 같을 것이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그 누구보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 온 이 세상의 모든 ‘허삼관’들에게 그 사랑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직접 표현해 보면 어떨까. 더 늦기 전에 얼른!

 김효정<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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