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 김효정
  • 승인 2014.12.15 16: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명랑한 소설 관람] 33.

 어느 날 문득, 바로 그 순간,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하던 일을 멈추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 차를 타고 정처 없이 떠나는 일은 사실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우선 내가 떠남으로 인해 가정이나 직장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일들이 나의 발목을 붙잡을 것이 뻔하다. 현실적이면서도 생존적인 문제들. 하지만 지금의 내 삶이 사실 수많은 시간의 극히 작은 일부분이라면,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로 인해 내 삶이 미완성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라면 한번쯤은 그 경험들을 찾아 떠나도 좋을 것이다.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과 교수이자 작가인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이러한 경험적 존재에 대한 의문들을 풀어내고 있다. 특히 일탈을 통해 인간의 내면과 언어와의 상관관계를 풀어나가면서도 다면적인 인간 본질에 대한 성찰을 담아내고 있다.

 학교에서 고전문헌학을 가르치는 교사 그레고리우스의 삶은 단조롭고 경직되어 있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아침, 그 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거리를 걸어 학교에 가던 그의 앞에 낯선 여인이 등장하면서 그의 삶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다리위에서 뛰어내리려던 여자를 구해준 그레고리우스는 그녀에게 모국어를 묻고, 그녀는 ‘포르투게스’라고만 답한다. 그 단어의 독특한 울림에 이끌린 그레고리우스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녀의 흔적을 좇아 책방에 들렀다가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포르투갈 책을 손에 넣게 되고 책속의 인물을 찾아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이 따라가는 책 속의 주인공 ‘프라두’의 삶을 통해 자신의 인생도 반추해 나간다. 존경받는 의사이자 시인이며, 저항 운동가였고 격정적인 사랑에 몸부림 쳤던 프라두. 어쩌면 프라두의 모습은 그레고리우스 자신이 갈망하던 삶이자 자신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작가는 오랫동안 언어와 철학 문제에 천착해 온 학자답게 프라두를 통해 글쓰기를 실존과 언어의 문제로 바라본다. 내가 인식하는 자아와 타인의 눈에 드러난 자아, 남이 말하는 나와 내가 말하는 나, 현재의 삶을 경험하는 나와 감추어진 삶을 지향하는 나 사이의 간극을 계속 파고든다.

 즉 언어를 통해 나의 감정과 생각들을 표현할 수 있을 때 그 순간 존재하는 것이며, 행복해질 수 있음을 역설하는데 다소 철학적인듯 한 문장들은, 그러나 곱씹을수록 유려하며 많은 생각거리들을 던져준다.

 빌 어거스트 감독의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는 제레미 아이언스가 ‘그레고리우스’역을 맡아 밀도 있는 작품을 완성해 냈다. 특히 감정적인 폭발이나 극적인 장치 없이도 영화가 주는 몰입도는 상당하다. 또 영화 속 대사와 내레이션들도 원작 못지않게 우리를 철학적 사유로 안내한다.

 누구나 한번쯤 꿈꿔 보는 일탈과 지금과는 다른 삶. 그것은 단지 상상속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다른 삶에 대한 갈망은 현실의 저항이라 표현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저항마저도 실존의 증거가 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무척 아름다운 작품이다. 한 해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나’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질문과 응답이 필요하다면 그레고리우스와의 기차 여행을 권해본다.

 김효정<북칼럼니스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