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없음의 위험함을 엿보다
생각 없음의 위험함을 엿보다
  • 임규정
  • 승인 2014.12.11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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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오펜하이머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이 개봉했다. 1965년 쿠데타가 발발한 후 인도네시아에서는 반공을 명분으로 한 학살이 발생했는데, 이 때 목숨을 잃은 희생자가 최소한 100만 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액트 오브 킬링”은 이 대학살의 주범인 안와르 콩고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안와르 콩고가 그저 평범한 할아버지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화면에서 드러난 안와르 콩고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자애로운 할아버지 같은 사람으로, 새끼 오리를 험하게 다루는 손자에게 오리가 아플 테니 사과를 하라고 하는 선한 면도 가진 인간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아연할 수밖에 없다. 이 사람이 어떻게 그런 대학살의 주모자일 수 있단 말인가?

이쯤에서 한나 아렌트가 얼마나 통찰력 있는 관찰자였던가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유태인 학살에 핵심역할을 담당한 나치 중령 아이히만의 재판을 취재한 아렌트의 기록,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는 악이 얼마나 평범한가가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아렌트는 나치를 비해 미국으로 이주한 독일 출신 유태인으로, 아이히만의 재판을 취재하기 시작했을 때는 그녀 자신조차 스스로의 발견을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히만은 600만의 유태인 학살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하나, 사악하거나 냉혈하거나 정신 이상이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히만을 굳이 분류하고자 한다면, 그는 성실하고 건실한, 준법정신과 충성심이 투철한 시민이자 군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발견 앞에서 우리는 절망한다. 일상에서 드러나는 선함과 성실함에 기댈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 사람을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토록 평범한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그러한 일을 자행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절망이 핵심이라고, 아렌트는 아프게 지적한다. 아이히만이 유태인 학살에서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잔악무도한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완전히 생각이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무슨 일인가를 돌아볼 수 있는 반성적 사고, 그리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그려볼 수 있는 상상력. 이런 생각 없음의 상태에서 출세하고자 하는 아이히만의 욕구는 나치에 대한 무비판적인 충성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런 뼈아픈 깨달음은 다시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반성적 사고와 상상력 없이는 평범한 누구라도 그러한 일을 자행할 수 있다. 잔학한 범죄는 때로, 적극적 악이 아니라 수동적인 생각 없음에서 비롯된다.

“액트 오브 킬링”의 말미에서 안와르 콩고는 자신의 행적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면서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사실은 우리도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과연 얼마나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고, 내 언행이 타인에게 미칠 영향을 얼마나 생각해보고 있는가? 많은 이가 바쁜 일상에 지쳐,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 하루가 어떠했는가를 돌아보는 것조차 힘겨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경제가 어렵고, 삶이 고되기에 그저 타성에 젖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 생각 없음의 함정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보아야 한다. 그 함정의 끝에 아이히만과 같은 대죄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반성과 배려 없이 우리는 내 삶의 주인으로서 바로 설 수 조차 없다.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을 다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바르게 지탱할 척도가 되어줄 것이다.

 임규정 <군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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