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전쟁영웅을 찾아서 : 현 봉 학
이달의 전쟁영웅을 찾아서 : 현 봉 학
  • .
  • 승인 2014.12.08 15: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현 봉 학(1922~2007)

 현봉학 의학박사는 1922년 함경북도 성진 출생으로 함흥고보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했으며 광복 후 가족과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그 후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의대에서 학업을 수행한 후 귀국한 현봉학 박사는 민간인 신분으로 1950년 8월초 미군의 통역관에 임명되었다. 

 당시 전황은 전쟁발발 한 달여 만에 낙동강까지 밀려났던 국군이 유엔군과 함께 북한군의 총공세를 막아내고 인천상륙작전과 동시에 38도선을 넘어 압록상과 두만강을 향해 북진을 계속하였으나 10월 하순경부터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바뀌었다. 장진호 일대에서는 8만 명의 중공군에 의해 2만의 미 해병1사단이 포위되었고 그 북쪽에 있던 미10군단 부대도 고립되었다. 그런데 중공군 못지않은 무서운 적은 밤에는 영하 30도 가까이 내려가는 날씨였다. 수많은 병사들은 처음 겪어보는 무서운 혹한에 노출되어 쓰러지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병사들도 동상으로 손발을 잃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또한 흥남항에는 많은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그들 대부분은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유엔군에 협조하거나 기독교인 등이 대부분으로 흥남항에서 승선하지 못하면 많은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처지였으나, 작전을 책임진 알몬드 소장의 입장에서는 10만 여명에 달하는 미 제10군단 병력의 철수도 어려운데 민간인 철수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현봉학 박사는 알몬드 소장을 찾아가 “적이 사방에서 쳐들어오고 있는데, 이들 민간인들이 어디로 갈 수 있겠느냐?”고 여러번 간청과 설득하였고 그의 열성에 감동한 알몬드는 결심을 바꾸어 군수물자의 철수를 포기하고 9만 8천여 명을 메러디스 빅토리호 등의 수송선으로 거제도로 오게 하였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생사의 기로에 놓인 수 많은 주민을 구하는데 열과 성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민족애와 휴머니즘을 보여 주었다.

  <제공 전주보훈지청 ☎063-239-452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