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개의 찬란한 태양-나처럼 사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천개의 찬란한 태양-나처럼 사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 박혜경
  • 승인 2014.11.26 16: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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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일간의 싱가포르 AAF 행사를 성황리에 그러나 힘겹게 마쳤다. 어젯밤 싱가포르 공항, 젖은 솜 같은 몸을 커다란 짐에 의지하고 자정이 넘어 출발하는 비행기를 기다리다가 운 좋게 세 시간 앞서 출발하는 비행기의 빈자리를 얻게 되었다.

  인천에 도착할 때까지 네 편의 영화를 내쳐 보는데 아름다운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의 어록 중 “왕자와 결혼한 여배우의 삶이 동화 같을 거라는 생각은 동화”라는 대목에서 크게 한 소식을 얻었다. 말 그대로 백마를 탄 왕자와 결혼한 아름다운 금발의 여배우조차 삶의 무게는 너나없이 똑같다는 말의 다름이 아닌가. 안 팔린 그림들을 싸서 돌아오는 나와 나의 작가는 내내 말이 없었다. 나처럼 사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나도 당신도.

 실은 이 칼럼에 ‘항산이어야 항심이다‘라는 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준비했었다.

 일전 젊은 작가의 방문을 받아 새로운 작업들을 함께 보면서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었다. 그는 타지역의 예술지원 프로젝트에 선정되어 탄탄하게 자신만의 위치를 다져나가는 작가다. 그림을 사고파는 일을 하다 보니 그림을 그려 어렵게 생활을 꾸려나가는 화가들의 속내를 피치 못하게 알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넓은 작업실과 좋은 전시기회를 제공 받는 이 작가의 경우조차 실제론 작품이 전혀 팔리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화상인 동시에 작품 수집가다. 화랑 문을 연 1997년부터 현재까지 나의 수집품은 우리 지역 출신의 작가로 제한되어 있다. 수집된 대부분 작품은 좋은 가격은 고사하고 되팔기도 어려운 작품들이다. 작품을 구입하는 이유 중 하나가 우상향의 희망을 담고 있다면 나는 우직하고 몽매한가? 허나 후회는 없다. 내가 일군 보람과 기쁨은 수치로 계산되는 것에 대적할 바 아니라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2001년 캐나다의 에드몬튼에 방문했을 때 그 지역 주립미술관을 찾았었다. 우리나라의 서양화 도입 초기 그림처럼 보이는 작품들이 멋진 방에 전시 되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에드몬튼의 첫 서양화 그룹 세븐이라는 그룹의 작품전이 그것이었는데 나는 마치 시간의 화석을 들여다보듯, 100여 년 전 일곱 명의 화가가 에드몬튼에서 첫 서양화 그룹을 만들고 의견을 교환하면서 서로 독려하고 작업했을 결과물을 보는 행운을 누렸다. 기록을 발굴하고 보존하고 연구해낸 그 전시에 큰 감동을 받았다.

 다른 볼거리가 풍성했지만 지금도 내 기억은 인상파 풍의 세븐 작가들 전시를 기획한 미술관의 방향성이 전해주는 메시지에 주목하고 있다.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일을 못한다면 지금 있는 것들의 한 켜를 기록하는 것으로 나의 삶의 방향을 정하는 것 또한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그때 일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기록에, 기록하는 이의 의도가 들어 있지 않은 기록은 있을 수 없듯 나 또한 우리 지역의 작품을 수집하고 지역작가의 작품을 널리 알리고 판매하는 일에 나의 분명한 의도와 확신과 배경이 있다. 그 의도와 확신이 보는 이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하고 위로를 주기도 하고 때로 구입하고 싶은 욕구를 만들어 내기도 할 것이다. 또한, 반대로 편협하고 부족하고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음도 감수한다. 나처럼 사는 사람은 나밖에 없기에.

 다시 항산이면 항심이다-로 돌아가 생각한다. 물감을 아껴 써야만 했고 부족한 색깔은 만들어 써야만 했던 고흐는 단 한사람의 지원으로 893점의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팔리지 않는 작품을 지원하는 사람도 때로 고달팠으련만 그 지원이 없었더라면 별이 빛나는 밤은 그림으로도 노래로도 탄생하지 못했을 거다. 가난한 화가들이 항심으로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값이 오를 만하지 않은 작품을 나의 권유로 구입해주신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깊이 감사하며 앞으로도 변함없는 후의를 부탁드린다. 화랑에 찾아와 어려움을 토로한 젊은 작가에게 구매자를 찾아주겠다고 이미 약속해버렸으니.

 덧붙여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를 다소 무리해서 여기에 소개한다. 『언젠가 내 그림이 팔릴 날이 오리라는 건 확신하지만, 그때까지 너에게 기대서 아무런 수입 없이 돈을 쓰기만 하겠지. 가끔 그런 생각을 하면 우울해진다. 1888. 10. 24』 고흐의 그 우울함으로 만들어진 그림은 해마다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다.

 박혜경<전주 서신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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