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선·면
점·선·면
  • 박재천
  • 승인 2014.11.13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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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의 연주 형태는 크게 ‘솔로’와 ‘듀오’ 그리고 ‘트리오’의 구성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솔로 연주는 ‘점’에 빗댈 수 있다. ‘점’은 측정할 수 있는 길이와 면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점이라는 특성상 그 ‘깊이’만 존재하는 데 찍어진 점의 ‘깊이’는 측정할 길이 없다. 때문에 ‘솔로 연주’가 연주가로선 가장 어려운 경지이다. ‘듀오’ 연주의 경우에는 두 사람의 팽팽한 관계 속에 ‘선’이 존재한다. 그 선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두 연주가들의 긴장과 이완 등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다음으로 ‘트리오’ 형태의 연주에서 ‘면’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면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트리오 연주에서부터는 단순히 면의 존재뿐 아니라 그 면에 어떤 색을 입힐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의 전통음악은 보통 솔로 연주로 되어 있다. 기본적인 장단 연주자가 옆에서 함께하는 경우가 있지만, 엄밀히 말해 솔로 형태의 연주다. 이제 솔로 연주의 깊이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는 철저히 개인의 노력과 정성의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 전통음악은 오랜 세월을 갈고 닦아 연마해야 하는 테크닉적인 ‘실력’의 음악이 아닌 스스로 얼마만큼 정성을 들이고 힘을 다했는지를 이르는 ‘공력’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요즘 국악계에 ‘앙상블’ 또는 ‘퓨전’이라 이르는 음악의 형태가 많아지면서 많은 편성이 솔로 연주의 깊이나 듀오 연주의 긴장관계의 음악보다는 삼각관계 또는 사각관계 이상의 편성이 많아졌다. ‘면’이 드러나는 연주의 편성이 많아진 것이다. 이렇게 음악에서 면이 보여질 때, 그면은 단순히 흑백의 심플한 컬러가 아닌 어떤 색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에 수반되는 문제가 ‘화성(harmony)’이다. 조성이 깨어진 ‘무조(無調)시대’를 지나면서 20세기 초반부터는 ‘컬러(color)’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화성은 ‘진행’이라는 원칙이 있어 일반적으로 자주 사용되는 평범한 화성의 진행을 따르는 방법이 있고 일반적인 진행 형태와는 어긋나 보이지만 어떤 색감을 나타내기에 더 풍성해진 음색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단히 불행하게도 우리 전통음악은 화성의 시스템이 없는 선율 구조와 장단 구조로만 구성된 오랜 전통과 습관에서 파생된 음악이다. 그렇기 때문에 색감을 입혀나가는 데 상당한 고통이 따른다. 색감과 화성을 정하게 됨으로써 전통에서 보여줬던 고유한 방식은 본질을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마치 세숫대야의 맑은 물에 떨어진 잉크 한 방울로 인해 그 물이 순식간에 변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많은 현대 음악가들이 한국의 음악을 세계화해 나가는데 고통이 따른다고 토로한다.

 서양의 화성은 1720년경에 대 음악가 ‘바흐’를 통해 ‘평균율’이라는 화성의 세계표준화가 시작됐다. 이 시스템은 200년 이상(무조음악이 탄생하는 1900년대 초기까지) 다양한 경로와 다양한 음악의 작품들 그리고 수많은 전 세계의 작곡가들에 의해서 변화하고 발전해왔다. 그런데 작곡자나 편곡자들이 전통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데 화성을 도입해 쓰는 일이 빈번해진 현시대에 과연 서양의 화성 시스템을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는지 염려스럽다. 팝이나 클래식, 재즈에서 사용된 몇 개의 패턴을 여과 없이 우리의 음악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각국의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은 서양의 화성 시스템을 통해 이미 오랜 기간의 연구와 실험을 거쳐 오늘날 우리가 들으면 특정 이미지를 전달받을 수 있는 장르로 자리 잡았다. 샹송, 보사노바, 칸초네, 레게, 록, 발라드, 랩 등의 장르별 또는 인도풍, 러시아풍, 남미풍, 북유럽풍 등의 지역별 음악 형태가 바로 그것이다.

 필연적으로 점 또는 선이었던 우리의 음악을 면이 보이는 음악으로 바꾸고 발전시켜 나가려면 많은 색을 표현할 수 있는 ‘화성 시스템’을 보다 깊이 연구해야 한다. 단순히 ‘평균율’, ‘민속 순정율’과 재즈에서 쓰이는 ‘교회선법’ 등의 이론적인 연구보다는 먼저 ‘우리 음악을 어떻게 포장할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우리 음악의 새로움을 위해서 들이대는 잣대가 ‘우리로부터의 서양시스템’이지 ‘서양시스템으로부터 우리’는 아니어야 한다. 이 문제는 나에게도 역시나 상당한 고통과 깊은 고민이 따르는 일이다.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지금보다는 선명한 화음을 사용한, 우리에게 딱 맞는 색깔을 가진 멋진 음악을 만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기도 한다.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어린아이마냥 간절히 말이다.

 박재천<세계소리축제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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