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견의 보이차이야기] 12. 6대 차산의 현주소
[김세견의 보이차이야기] 12. 6대 차산의 현주소
  • 김세견
  • 승인 2014.11.13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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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러산(悠樂山), 이방산(倚邦山), 망지산(莽枝山), 꺼등산(革登山), 이무산(夷武山), 그리고 만?산(蠻塼山)이 유명한 6대 차산이다. 시솽반나주 징홍시(景洪市) 동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구체적으로는 멍라현(?臘縣)의 이무(夷武), 상명(象明) 지역이다.

 의방 같은 곳은 청나라 초기부터 이름을 떨쳐왔으며, 이무지역은 근세 초기까지도 숱한 차창들이 보이차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 보이차가 주로 거래된 곳이 쓰마오시(현 푸얼시)였다면, 6대 차산 지역은 명실상부한 생산지였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이 지역의 고수차는 거의 사라지고 보이차의 큰 명맥은 맹해 지역으로 옮아가게 된다. 이 지역을 찬란하게 발전시켰던 고수차원이 사라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 프랑스와 영국의 잇단 침입

 18세기 이후 세계 무역의 총아로 떠오른 것이 차였다. 면화나 식료품 등이 일반 국민들을 위한 것이었다면, 귀족들을 위한 무역이 바로 차와 도자기였다. 세계에서 가장 질이 좋은 차가 나는 이 지역을 당시 패권을 다투던 이 두 나라가 좌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프랑스와 영국이 이 지역을 십여 차례 침입했고, 그로 인한 피해가 컸다. 그들이 침입하는 목적지가 바로 이무지역이었기에, 이 부근이 전쟁터가 되어 특히 고수나무에 피해를 많이 입었다.
 

 ▲ 차상인의 난 - 옹정제

 이것은 이무지역 차 상인들이 청나라 조정의 징세에 대해서 반발한 민란이다. 이 지역을 무대로 수 년 간 저항함으로써 고수차원의 피해가 더욱 극심해졌다.
 

 ▲ 국공내전

 모택동과 장개석 군대가 36년 국공합작 직전과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이전하기 직전 무렵인 47-8년도에 걸쳐 이곳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이 싸움은 대만의 국민당정부가 공식적으로 철군을 명령한 80년대까지 이어졌다.
 

 ▲ 문화 혁명

 명맥을 유지하던 이 지역 고차수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것은 문화 혁명이었다. 고수차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신품종 차나무를 심는 것이 혁명의 주요 목표였는데, 6대 차산지역이 차 생산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철저한 혁명이 수행되었다. 이 무렵 이 지역에 새로 심은 품종이 안타깝게도 대엽종이 아니라, 소엽종이 대부분이다.
 

 ▲ 74년 산불

 73년 말에서 74년에 걸쳐 일어난 이무 지역의 산불은 이 지역에 남은 마지막 고수차마저 불살라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헤이나 눠수이동 등 몇몇 마을에 고수차가 산발적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남아있는 고수차의 양이 지극히 적고, 그 주변이 대개 밭차이기 때문에 순수한 고수차만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차를 따보면 따기 쉬운 타이띠(밭차) 차를 두고 따기 어려운 고수차를 따올 리는 없다.

 

 김세견<차마루 교육원장> * 이 자료는 보이차 탐구모임 ‘프얼티클럽’, ‘차마루’에서 지원을 받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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