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 이동희
  • 승인 2014.11.04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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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날’이 올해부터 공식 기념일[공휴일]이 되었다. 천만다행이다. 한글을 소홀히 여기며 그 고마움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지난 세월을 자책하는 마음이 조금은 위로받는 듯하다. 심지어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가 ‘어린[어리석은] 백성’을 위하여 만들지 않고, 중국 한자음과 너무도 다른 조선의 한자음을 바로잡기 위해 만들어졌다며 한글창제의 근본정신을 의심하는 주장도 있음을 보았다.

 일부 편벽된 생각과 헐뜯으려는 의도가 있다 할지라도 훈민정음 창제의 서문에 드러나 있는 근본정신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우리말이 중국과 다르다는 ‘자주정신’, 문자를 자유롭게 쓸 수 없는 백성을 위한다는 ‘애민정신’,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다는 ‘창조정신’, 쉽게 익히고 날마다 쓰기에 편하게 하련다는 ‘실용정신’이 녹아들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중국 한자음을 바르게 쓰려는 의도가 있다 할지라도 한글이 엄연히 위에서 밝히 네 가지 정신으로 쓰이고 발전해 온 우리말과 글의 역사를 보면 뚜렷이 알 수 있다. 역사의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만약 한글창제를 하지 않아 우리 민족이 아직도 한자를 생활문자로 썼더라면 어땠을까? 생각만이라도 섬뜩하다. 그로 인해 더디고 막혀 이룰 수 없었던 문화의 실상은 고사하고,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하긴 한글창제 568돌을 맞는 오늘까지도 창제 당시 사대주의의 발상과 자주정신의 결핍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현실이 부끄럽기만 하다.

 대한민국의 수도 한복판에 구국의 영웅 충무공 동상이 위엄 있게 홀로 나라를 지키던 모습에 뭔가 아쉬움을 느꼈었다. 그러던 차에 문화 융성의 영웅이신 세종대왕의 동상을 함께 세워 비로소 문무文武가 균형 잡힌 나라의 얼굴을 보여주어 뿌듯하기만 하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동상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의 얼과 넋의 뿌리인 우리말 한글을 만드신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한 세종의 바로 등 뒤에는 光化門이 떡 버티고 있어서다. 우리 국민이야 역사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원형을 살렸다고 이해하겠지만, 부쩍 많아진 외국 관광객들에게 바로 세종의 등 뒤에 있는 光化門이라 쓴 문자를 만드신 분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외국인을 위해서 ‘光化門’을 ‘광화문’으로 바꾸자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흔적은 박물관에 따로 소중히 보관하여 계승하고, 세종의 등 뒤에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한글로 ‘광화문’이라 밝히면 얼마나 떳떳하고 자랑스럽겠는가? 그 광화문도 옛것 그대로가 아니라 새로운 자재와 기술로 다시 세운 것이 아니던가.

 우리에게는 자신도 모르는 고정관념이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자주정신의 모자람과 큰 나라를 섬기려는 의식이 그것이다. ‘중요한 주제는 [고귀한]한자로 쓰고, 백성들의 실생활은 [하찮은]한글로 쓴다’며, 무시하고 업신여기느라 한글을 언문이네 암글이네 하던, 못된 습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탓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민의의 전당이요 삼권분립의 한 축인 국회를 상징하는 배지는 여전히 ‘나라國’자를 새기고 있다. 국회의원들의 가슴에서 번쩍이는 금배지가 중국의 민의를 대신하는 것인가? 이 배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國자도 아니고, 한 지역을 뜻하는 域자에서 흙토변이 빠진 모습이거나, 아니면 혹, 혹시를 뜻하는 或자로 보이기도 한다. 이 ‘혹’자 밑에 마음 心자를 붙이면 유혹한다는 뜻이니, 국회의원들이 각종 비리에 연루되는 사례가 많은 것을 보면 혹시 이 배지의 저주는 아닌지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법부라고 다르지 않다. 헌법을 수호하고, 국가권력을 통제하며,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당하는 국민을 구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헌법재판소’의 정문에 다음과 같은 문자가 새겨져 있다. <모든 國民은 人間으로서의 尊嚴과 價値를 가지며 幸福을 追求할 權利를 가진다. 國家는 個人이 가지는 不可侵의 基本的 人權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義務를 진다.> 왜 ‘확인과 보장’마저 한자로 쓰지 않았는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이를 보고 있으면 우리가 얼마나 한심한 나라에 살고 있는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는데, 정작 이 문을 드나드는 분들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행정부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부에서 시작하여 점점 더 뜨거워지는 영어 열풍은 이 땅이 미국의 식민지이거나 곧 미국의 쉰한 번째 주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이 든다. ‘나랏말’이 어찌 중국하고만 다르겠는가?

 이동희(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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