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의 도성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후백제의 도성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 유병하
  • 승인 2014.10.30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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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후백제(後百濟 892~936)의 도성(都城)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난무해왔다. 도성의 원래 모습, 궁성(宮城)의 위치, 성벽의 축조, 주변 산성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 학자마다 의견이 달랐다. 특히 궁성의 위치가 대표적인 사례인데, 물왕멀과 동고산성, 전주부성(全州府城) 일대, 문화촌 일대 등으로 제각각 다른 주장이 펼쳐져 왔다. 이렇게 전주가 후백제의 고도(古都)로 오랫동안 알려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기초적인 사실마저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급속한 도시화 때문이다. 60,70년대 이후 전주시는 빠른 속도로 도시가 팽창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각종 성벽이나 건물의 흔적들이 대부분 파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굴조사나 지표조사를 통해서 도성의 흔적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난제였다. 그래서 국립전주박물관은 일제강점기와 정부 수립 이후의 각종 사진자료를 통해서 도성을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즉 일제강점기의 지형도와 지적도, 도시계획도, 1948·1954년도 항공사진, 1968년도 위성사진을 분석하여 후백제 도성의 위치와 구조, 방어체계 등을 상세히 밝힐 수 있었다.

900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후백제의 도성은 궁성과 내성(內城), 외성(外城)으로 구성되었다. 궁성은 문화촌(인봉리) 일대에 항아리 모양으로 축조(築造)되었으며, 전체 둘레는 약 1,800m 정도로 추정된다. 궁성을 둘러싼 내성은 기린봉에서 ?어내린 구릉에서 전주동초등학교 너머까지 이어지며, 다시 남쪽으로 전주 시청부근을 지나 천주교 전주교구청 앞의 평지를 지나 승암산과 연결된다. 동벽은 궁성의 동벽과 중복된다. 해발 50~80m 정도의 구릉지대가 궁성과 내성의 입지로 활용되었고, 일부는 전주시청이나 풍남초등학교처럼 평지가 그대로 도성지로 활용되었다. 내성의 전체 둘레는 4,800m 가량이며, 형태는 반월형이다. 한편 전주시청 서쪽의 평탄지대는 민가나, 시장, 관청 등이 포함된 시가지로 이 일대를 보호하기 위해 북으로 약 1,200m의 성벽이 추가로 축조되었다. 이것이 바로 외성으로 내성의 동벽 및 북벽과 길게 이어지면서 도성 전체를 보호하는 나성(羅城)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성벽(城壁)은 대부분 자연구릉을 이용하였으며, 구릉 사면에 흙을 쌓은 후 기초부에 돌을 보강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평지에는 이용할만한 자연물이 전혀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성벽을 돌로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관선교천과 사천이 내성을 보호하는 해자의 역할을 하였으며, 그 주변으로 전주천과 승암산에서 갈라져 서북방향으로 이어지는 산지가 자연적인 방어벽의 역할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동고산성과 남고산성, 서고산성의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견훤(甄萱 867~936)이 세운 도성은 구릉과 하천, 산의 능선과 같은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축조되었다. 일찍이 견훤이 무진주[광주]을 기반으로 거병(擧兵)하였던 892년부터 전주를 도성지로 선정하고 축성(築城)을 준비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후삼국의 경쟁 속에 지속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국가체제를 정비해 나가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축성 여건을 갖추기란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따라서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현실적 축성계획을 수립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은 성과는 몇 가지 측면에서 후백제의 연구에 매우 중요하다. 먼저 후백제의 궁성과 도성의 위치 비정에 대한 많은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되었고, 조선시대의 문헌기록이나 일제강점기에 출간된 <전주부사(全州府史)>의 내용을 객관적인 데이터로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그동안 손에 잡히지 않던 후백제 연구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것임을 의미한다. 즉 도성지를 발굴함으로써 그곳에서 나온 유물과 유구를 통해서 직접 후백제의 견훤과 도성에서 살던 사람들의 흔적을 직접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 전주 이외의 지역에서 후백제와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유적들의 연구가 보다 활성화될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진안 도통리 청자 가마, 정읍 지역의 평지성(平地城), 장수나 진안, 광양 지역의 산성(山城), 완주 지역의 사찰, 군산 지역의 포구(浦口) 등이 전주의 도성에서 출토된 유적과 유물을 비교함으로써 후백제와 관련되었음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후백제의 도성에 대한 세부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앞서 확인된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예컨대 풍남초등학교와 전주제일고 운동장에 대한 지중탐사[GPR]를 실시해서 궁전과 직접 관련된 유구를 찾아야 하며, 전주정보영상원 뒤 토축물(土築物)의 단면조사도 실시해서 궁성의 성벽임을 확정해야 한다. 아울러 천주교 전주교구청과 인보성체수도원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서 내성 내의 중요시설도 구체적으로 찾아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국립전주박물관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벅찬 과제이다. 전라북도와 전주시, 문화재조사연구기관, 대학 등 관련된 기관이 모두 나서야 한다. 앞서 도성을 찾아내는 작업도 국가기록원과 국방부, 전주시, 군산대, 개인소장가(이호림)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방송사와 언론사도 이제는 눈에 보이는 후백제를 알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 이유는 후백제야 말로 전북의 정체성이요, 자랑이기 때문이다.

 유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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