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자랑-가인 김병로
전북의 자랑-가인 김병로
  • 유길종
  • 승인 2014.10.27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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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 29일 전라북도 법조계와 학계 및 정치권 인사들이 망라되어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의 기념관을 전라북도에 건립하기 위한 가인 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가 발족하였다.

 가인 김병로 선생이 우리나라 법조계 전체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분이라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가인은 직접 의병항쟁에 참전한 항일독립운동가이자, 독립투사들의 변호인이었다. 일본 순사를 죽인 김상옥이라는 사람을 변론하면서 “독립을 희망함은 조선인 전체가 다 같은 것”이라고 일갈했다. 1920년대 가인은 허헌, 이인 변호사와 함께 전국 각처로 달려가 항일 투사들을 변론했다. 법정변론뿐만 아니라 감옥 접견, 사식차입, 출옥 후 뒷바라지까지 도맡아 했다. 1930년대에는 변호사자격을 정지당하는 박해를 받으면서도 직접 간접으로 여운형, 안창호, 조용하 등 독립투사들의 변론을 맡아 수행했고, 일제 말에는 경성의 집을 정리하고 경기도 창동으로 가서 농사도 짓고, 닭도 치면서 자립형 살림을 해가며 변절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으로서 신생 독립국인 대한민국의 법질서를 확립하고 사법권 독립을 공고히 하였다. 대법원장으로서 그는 사법권의 독립과 법관의 독립을 각별히 강조했다. 강골형 독립지사로서 중망과 정평을 받고 있던 그가 아니었다면 건국 초기에 사법권의 독립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때로 사법부를 비난했지만, 가인 김병로 대법원장에 대한 일체의 사적 비난은 할 수 없었다. 대법원장으로서 김병로는 법관의 몸가짐을 각별히 강조하면서, “청렴한 법관”의 상을 정립했다. 가족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수준의 박봉으로 힘들어하는 법관들에게 “굶어 죽는 것이 영광”이라는 자세로 명예롭게 살 것을 주문했다.

 1952년 임시 수도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재선과 독재정권의 기반을 굳히기 위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인과 경찰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상태에서 강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킨 이른바 ‘부산정치파동’ 사건이 일어나자, 가인은 대법관들에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라고 강조했다.

 이런 가인 김병로 선생이 자랑스럽게도 우리의 고장인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태어났다. 그럼에도, 전라북도민의 70% 정도는 가인 김병로 선생을 알지 못하고, 특히 20대의 91%는 가인 김병로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우리 지역이 배출한 걸출한 인물이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큰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시민들은 가인 선생이 우리 지역 출신인지도 잘 알지 못하는 형편인 것은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전라북도가 오랜 세월 침체를 겪으면서 활기를 잃고 원대한 비전과 긍지가 부족한 지역이 되고 있는 이때에 가인 선생의 일생을 다시 조명하면서 전북의 정신과 문화를 되새길 필요가 절실하다.

 전라북도지방변호사회는 새로 조성되는 덕진구 만성동 법조타운 내에 가인 선생을 비롯하여 이 지역이 배출한 훌륭한 법조인들을 기념하는 기념관을 건립할 계획을 세우고, 그 부지대금을 변호사회가 기부하고 전주시나 전라북도가 국비 등의 지원을 받아 건축비를 부담하여 기념관을 건립하자고 제안했고, 전주시와 전라북도는 이에 전폭적으로 동의한 상태이다. 이번에 법조계는 물론이고 학계와 정치권이 가인기념사업의 필요성과 당위성에 공감하고 범도민적 기구로 가인 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한 마당이므로, 조속히 후속 절차가 진행되어 가인 기념관이 전북인들의 긍지와 자존심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하기를 희망한다.

 유길종<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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