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집합명사가 아니다
‘사람’은 집합명사가 아니다
  • 이동희
  • 승인 2014.10.0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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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우리나라에 있는 정규 공교육기관의 모든 교사를 역임한 전력을 지니고 있다. 초·중 고등학교 교사는 물론 대학교와 교사 재교육기관에서도 십여 년 강의하였다. 이런 정규기관만이 아니라 비정규기관이라 할 수 있는 곳, 이를테면 문학에 뜻을 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예교실에서도 이십여 년 강의하고 있으니 교직을 천직으로 여길 만하다.

 이런 교직관에 의해서 필자에게는 하나의 원칙이 있다. 반드시 이름으로 출석 확인을 하는 것이다. 사실, 학생들의 출석을 부를 때 대부분 번호로 대신하는 경우가 잦다. 시간도 절약되고 수업시간마다 되풀이되는 절차이니 이름 대신 출석번호를 부르는 것이 효율적이라 여겨 별생각 없이 그렇게들 한다. 그러나 필자는 출석번호 대신 반드시 학생의 이름을 불러 출석 여부를 확인하였다.

 교편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편에서 보면 학생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뭐 대단한 것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분들에게도 학창시절에 담임선생님이나 교과담당선생님이 첫 시간, 첫 만남 때 출석부를 보지 않고 학생들의 이름을 암기하여 부르는 것에 감동했던 기억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 감동은 선생님의 출중하신 암기력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주신 그 성의에 놀랐음이 분명하다.

 사람은 개별 존재를 나타내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모든 사람을 통칭하는 집합명사일 뿐이다. 우리가 모두 사람임은 분명하지만, 모두가 똑같은 사람은 아니다. 저마다 빛깔과 저마다 소리와 저마다 냄새를 고유(固有)하게 지닌 개별 존재다. 그 누구도 ‘사람’이라는 집합으로 뭉뚱그려도 좋을 존재가 아니다.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자각과 인정으로부터 사람은 비로소 ‘내’가 될 수 있다. 그 ‘나의 나됨’을 나타내는 첫 단서가 바로 ‘이름’이다. 그러니 이름이야말로 한 개인의 개인됨을 인정하는 첫걸음이 된다. 이런 개별적 존재성을 인정하는 것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확립될 수 있다.

 이런 존엄성이 획일적 규제와 전체적 질서라는 효율성의 희생물이 되어도 좋은 개인[사람]은 없다. 사람을 개별 존재로 존중하지 않고 전체 관리의 대상으로 치부할 때 ‘사람’은 ‘물질’로 전락하게 된다.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격[이름]을 존중하지 않고 집합적 존재로만 다루려는 것은, 마치 인격적 존엄성을 유보당한 수감자들을 수형번호로 관리하는 격이며, 집단 사육하는 동물들을 식별번호로 관리하는 셈이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향한 비난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듯하여 안타깝다. [희생자]그들이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전사자도 아니고, 공익을 위해 헌신한 의사자가 아니라 일종의 교통사고 희생자들이라는 험담에는 말문이 막힌다. 여기에는 사람을 개별적인 고유한 존재로서 존중하지 않고 전체적이고 획일적인 대상으로 대하는, 무서운 냉혹성의 산물로 보여 섬뜩하기까지 한다.

 죽음은 어떤 죽음이나 아프다. 유일하고 유한하며 일회적 생명성의 원리에서 본다면 ‘죽어도 마땅한 죽음’은 없다고 보아야 사람이다. 설사 극악무도한 죄악의 결과가 죽음이라 할지라도 ‘죄’와 별도로 ‘생명의 존엄성’으로 보면 아픔일 수밖에 없어 사람이다.

 더구나 저마다 빛깔과 소리와 냄새를 지닌 누구누구의 아들딸이요, 오빠 언니 동생이며, 친구요 이웃이며, 제자요 스승으로서 고유한 개성을 지닌 개별적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들은 ‘<세월호> 교통사고 희생자 300여명’으로 불려도 좋을 집합적 대상이 아니다. 어찌 이들에게 그리 가혹하고 몰인정한 험담을 내뱉을 수 있는가? 이는 마치 사람[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다. 사람됨을 포기한 망발이 아닐 수 없다.

 일전에 완주군 동상면에 있는 ‘전라북도수목원’에 들렀다. 다양한 나무들이 잘 관리되고 있어 숲길걷기에도 좋았으며, 나무 공부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특히 이곳 참나무 군락지에 다양한 참나무들이 있어 좋은 공부가 되었다. 그런데 ‘참나무’는 집합명사였다. 어느 한 종만을 참나무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참나무는 참나무 6형제 각각의 제 이름으로 따로 존재한다.

 참나무 6형제도 뭉뚱그려서 참나무라 부르면 좋아하지 않는다. 갈참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라고 저마다 이름을 불러주어야 마땅하다. 하물며 사람이 아닌가? <세월호>에서 무참하게 희생된 너희의 출석을 부른다. 부끄러운 어른으로 너희들 이름을 부른다! 잊지 않기 위해 부른다. 이재욱, 남지현, 김도언, 백지숙…….

 이동희<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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