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견의 보이차이야기] 3. 보이차 산지의 역사
[김세견의 보이차이야기] 3. 보이차 산지의 역사
  • 김세견
  • 승인 2014.09.1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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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운남성에서 생산된 차를 말을 이용해 차마고도를 통해 티벳이나 다른 지역으로 공급하고 있는 모습. <제공=차마루>

 유목민들이 이 땅을 보(普)라고 부를 때, 한족들은 전(滇)이라 불렀다. 한족들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서남이(西南夷)라고 불렀다. 이족(夷族)인데 서남쪽에 사니 서남이가 되고 동쪽에 살게 되어 동이가 된 것일 거다

 이족(彛族), 바이족(白族), 그리고 라꾸족(拉祜族, 중국식으로는 라후족이라 읽는다)의 세 민족이다.이족은 자칭 고구려계라고 칭하고, 바이족은 백제의 후예라고 자처하며, 라꾸족은 신라를 잇는다고 말한다. 사실 여부는 역사학계에 맡길 일이고, 여기에서는 보 땅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본다.

 보 땅에 첫 국가를 세운 것은 고구려계라고 자처하는 이족들이다. 서기 739년에 이족의 족장 피라거가 현재의 중국 운남성 서쪽인 웨이산(山+魏 山)을 도읍으로 대리(大理 혹은 大麗)국을 세운다.

 이족들이 정권의 주축을 이루면서 강성해지는데, 동으로는 광동성에 이르고 서로는 인도의 아샘에 이르렀다. 나라가 강해지자 당시 중원의 강자인 당나라와의 다툼이 불가피해졌다. 당은 748년부터 754까지 3번에 걸쳐 3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오는데, 대리는 이를 능히 막아냈다.

 당은 대리와의 전쟁으로 피폐해져서 안록산 난(755년)이 일어나게 된다. 당 현종이 서남이에게 크게 져서 국운이 기울었다고 하지 않고 양귀비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한족들의 자존심 때문일까? 이후 이족계가 쇠퇴하고 바이족계가 급성장하여 황위(皇位)가 이족에서 바이족 단씨에게로 넘어가게 된다.이 때가 937년으로 태조왕 단사평(段思平)이 웨이산에서 따리(大理)로 수도를 옮기면서 백제계 황위를 이어간다.

 대리 단씨의 황가도 계속 번영을 하는데, 고비사막에서 몽고족이 일어나자 몽고와의 대결이 불가피해졌다. 지세의 험함을 이점으로 삼고 다소 태만한 틈을 타서 쿠빌라이의 부장인 우리앙카타이의 침입을 받는다. 리장(麗江)을 기반으로 한 나씨족들이 배신하여 험한 북쪽 산길을 향도하는 바람에 불의의 습격을 받고 1년을 항전했으나 결국을 무릎을 꿇는다. 이 때가 1253년이다.

 우리앙카타이는 따리에 보부(普府)를 열어 광대한 대리국 토를 다스렸다. 이러한 역사의 아픔 때문에 아직도 바이족은 나씨족과는 혼인하지 않는다. 이후 단씨 왕조는 지금의 치앙마이 부근에 아유티아 왕조를 열었다가 이후 남하하여 현재의 태국 왕실로 이어진다.

 고구려계와 백제계가 역사의 무대를 화려하게 열었을 동안, 신라계라고 자처하는 라꾸족들의 역사는 희미한 편이다. 현재 진정한 보이차라고 할 수 있는 고수차의 역사는 대부분 이족과 라꾸족이 이어왔다. 이 외에도 와족과 아이니족(하니족)도 있으나 미미한 편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고구려계와 백제계가 한 갈래였듯이 보 땅의 이족과 바이족은 한 갈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리의 황성(皇姓)인 단(段)씨가 이족과 바이족 모두에 있다.

 
김세견<차마루 교육원장> 

<이 자료는 보이차를 탐구하는 모임 프얼티클럽, 차마루에서 지원받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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