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부조화의 함정
인지부조화의 함정
  • 임규정
  • 승인 2014.09.11 15: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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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굶주린 여우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가 포도나무를 발견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포도가 너무 높이 달려 있어 딸 수가 없었다. 그러자 여우는 포도를 포기하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 돌아서며 중얼거린다. “저건 어차피 신 포도였을 거야.”

이것은 <여우와 신 포도>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이솝 우화의 줄거리이다. 여우가 허기진 상태에서 포도를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뻤을지 생각해보자. 그는 포도가 맛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며, 적어도 포도가 주린 배를 채워줄 만하다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과는 다르게 포도를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밖에서 접하는 우리는 객관적으로 이 상황을 판단하게 된다. “여우는 포도를 먹고 싶었는데 능력이 부족해서 못 먹었구나.” 여우는 다르게 말한다. “저건 어차피 신 포도라서 먹지 못하는 거였어.”

심리학에 “인지부조화”라는 개념이 있다. 인간은 자신의 믿음 간에, 혹은 믿음과 행동이나 상황 간에 어떤 불일치가 발생하면 불편함을 느끼고 그 불일치를 해소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여우와 신 포도>는 대표적인 인지부조화 사례인데, 포도가 배고픔을 해결해줄 것이라는 믿음과 포도를 따 먹을 수 없는 상황 사이에서 불일치를 느낀 여우가 믿음을 바꾼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많은 경우 이렇게 행동하는데, 6?25 당시 중국인들이 미국인 포로들을 어떻게 공산주의로 전향시켰는가를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중국인들은 수용소의 미국인 포로들에게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글, 혹은 반미적 글을 쓰도록 하고 보상으로 과자나 사탕을 몇 개 주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반미적 글을 쓴 많은 미국인 포로들이 공산주의로 전향하고 심지어 본국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상한 일이다. 이 포로들은 공산주의로 전향하라는 압박을 받은 것도 아니고, 공산주의로 전향하면 큰 보상을 얻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군인으로 참전할 당시만 하더라도 공산주의로 전향하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많은 사람들이 어느새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할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자신은 헐값에 신념을 버리는 그런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을 하고 있다. 그런고로 내가 사탕을 하나 먹으려고 나를 팔았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무척 어려운 사실이다. 이럴 때 인간은 사탕을 먹기 위해 나를 판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앞에서 예를 든 미국인 포로의 경우 이 정당화는 자신이 그러한 글을 쓴 것은 어떤 정당한 논리에 의해 설득당해서이지 사탕 때문은 아니었다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정당화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 중국에 남는 것까지 감행한다. 그러나 이들이 중국에 남기 위해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을 생각해보라. 가족도 친구도 조국도, 전쟁에 참여하기 이전의 삶도 모두 포기해야 한다. 고작 사탕에 나를 파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정당화하는 일이 이 모든 것을 포기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 심리학자 페스팅거의 관찰은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페스팅거에 따르면 인간은 본인이 지지하지 않는 행동에 참여한 보상으로 사소한 것을 받을수록 믿음을 바꿀 가능성이 높다.

삶은 수많은 작은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멀리서 볼 때 작은 사건들일 뿐, 삶의 현장에 있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사건들로 다가오게 된다. 때로는 그것이 작은 일이라는 것을 몰라서, 또 때로는 그것이 작은 일이라서 인생의 큰 부분을 버리고 바꾸는 일이 발생한다. 많은 경우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는 나약한 존재라서 때로 사소한 것 때문에 거짓말하거나 잠시 믿음과 상반되는 행동을 할 수 있지만, 스스로 나약함을 인정하고 훌훌 털어버리면 될 일이다. 비록 그 사소한 일이 오래도록 남아 괴로움을 남긴다고 할지언정, 그것은 나의 신념을 포기할 이유가 되기에는 합당하지도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 치열하게 삶을 살되, 나의 삶을 보다 멀리서 바라볼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하다. 굳건한 신념을 지키려고 노력하되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배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여유와 용기가 우리의 삶을 더 가치있게 만들어줄 것이다.

 임규정<군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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