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의 참 의미와 진정한 용기
겸손의 참 의미와 진정한 용기
  • 이용숙
  • 승인 2014.09.04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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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周易)은 주나라의 역서이면서 동양철학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주역에서는 인과의 법칙을 밝히며, 드러나 있는 현상보다 원인이 되는 인(因)의 종자를 소중하게 여긴다.

역의 철학은 태극으로부터 음과 양이 분리되는데, 양(陽)의 괘에는 음이 많다. 가령 『진(震)』괘는 양이 밑에 하나 음이 그 위에 두 개 놓여진다. 단순히 다수로 보면 음이 더 많지만 양괘로 분류한다. 주역은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종자, 곧 드러나기 이전의 상태를 주목하고 있다. 밑에 있는 양이 차츰 올라오면 장차 무엇이 될 것인가? 마침내 양으로 변할 것 이라는 해석이다. 음괘도 마찬가지로 다양(多陽)하다. ‘손’괘를 보면 밑에 음효가 하나, 그 위에 양표가 2개 놓여진다. 양이 많지만 음괘다.

64개의 괘에 각각의 의미를 부여하고 삶의 방편으로 해석하는 것이 주역의 철학이다. 모든 괘에는 나름대로의 길흉 화복이 있다. 시비?이해?대소?유무 등 일장일단이 있다.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는 그 상대성이 역철학의 원리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62괘 중에서 제일 좋은 괘를 ‘태(泰)’괘라고 얘기한다. 이 괘는 ‘지천태(地天泰)’라고 하는데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는 상이다.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것이 정상인데, 반대로 천지가 뒤집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제일 좋은 괘로 태평성대를 뜻한다. 땅은 아래에 있어도 몸은 위로 올라가서 하늘을 생각하고, 몸은 위에 있어도 마음은 아래로 내려와서 땅을 생각해 준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가치를 중시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 태괘에서도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있으니, 지나치게 형상을 드러내면 오히려 평화가 훼손된다. 늘 삼가면서 스스로 성찰해야 한다. 이와 같이 모든 괘마다 절대선 완전무결한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단점이나 그늘 위험이 있으니 경계하지 않으면 오히려 해독이 된다.
 

진정한 의미의 절대선은 겸손

그런데 아니다. 64개의 괘 중에 절대선인 괘가 꼭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겸(謙)’괘다. 겸괘에는 아무리 강조하고 드러내도 그늘이나 해독이 없는 유일 최상의 괘다. 겸손은 형통하니 군자의 지극함이 있다 (謙亨 君子有終) 겸손은 높은 지위에서도 빛나고 아래에 있어도 아무리 함부로 여기지 아니하니 군자의 지극함으로 최후의 승리자다.(尊而고 卑而不可踰 君子之終也)

겸은 땅 속에 산이 있는 형상(地中有山)으로 ‘지산겸(地山謙)’괘라 부른다. 이는 산은 산인데 독점하지 않고 많은 것을 덜어 작은 데 보태어 수평을 유지한다. 그리고 수평 곧 땅의 밑에 산이 숨어버리는 것이 지산겸이다.

겸손이란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 하여 무조건 남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이것은 진정한 겸손이 아니다. 밑으로 숨을 때 아무런 준비 없이 실력 없이 숨는 것은 어쩌면 비굴함일지도 모른다. 실력을 갖춘 이후에 자신을 낮추는 것, 도력이나 학덕 권세나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숨어버리는 그것이 곧 겸손인 것이다.

’명심보감’에 ‘만초손 겸수익(滿招損 謙受益)’의 가르침이 있다. 지나치게 많아 넘치면 손해를 입게 되고 겸손한 곳에는 언제나 이로움이 있다는 뜻이다. 진정한 실력을 갖추고서 자신을 낮추는 일이야말로 최고의 덕이다. 그러니 한량 없이 겸양을 실천할수록 더욱 빛나는 성취가 따를 것이다.

지산의 위 아래 괘를 바꾸면 산지(山地)가 되어 산이 평지 밑으로 숨는 게 아니고 반대로 평지 위에 돌출되어 ‘박(剝)’괘가 된다. 박락이란 새봄에 올라오는 새싹을 베어버리는 것이요, 박탈이란 빼앗아버리는 것이고 독점하면서 대중 앞에서 과시하는 것이다.
 

겸손은 진정한 용기이다.

겸이란 한량 없는 낮춤이요 숨김이다. 그러나 그것이 항상 조심하고 근신하며 몸을 도사리라는 것만은 아니다. 주역은 때로 과감한 추진력과 용기와 결단을 가르치기도 한다. ‘화풍정?택화혁?수풍정’괘는 혁신?혁명을 의미한다.

공자께서 노나라 사구의 직에 있을 때 소정묘를 사형에 처한 바 있다. 불법의 인과보응에 비추어 볼 때 업보를 받을까? 당연히 인과가 있다. 그렇다면 공자와 같은 성현이 왜 그런 취사를 했을까 생각해본다.

“인과가 무서워서 옳은 일을 못하는 사람은 인과를 전혀 모르는 사람만도 못하다.” 그렇다. 대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일, 나아가 천하를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아무리 무거운 벌을 받을지언정 희생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과가 무서워 결행하지 못하면 오히려 소인배인 것이다.

세상이 겸손을 알고 보다 겸손해 졌으면 싶다. 그리고 진정한 용기를 갖추고 늘 평등한 세상이 되었으면, 더욱 ‘지천’으로 태평한 날이 왔으면 싶다.

이용숙 <전주문화재단 이사장, 전주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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