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의 다시보기
영화 ‘명량’의 다시보기
  • 유병하
  • 승인 2014.08.28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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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의 열풍(熱風)이 매서웠다. 지금은 한풀 꺾였지만 한국 영화의 각종 기록을 갱신해 가면서 장안에 화제를 뿌렸다. 그러나 영화로서의 평가는 열기(熱氣)만큼 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영화에 대해서 저평가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모두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한다. 즉 이순신 장군 중심의 전투장면으로 영웅적 면모를 그려나가다 보니, 단조로운 싸움만 반복되고 해전(海戰)에 참여하였던 다양한 사람들의 인간적 고뇌나 활약상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전투의 전모(全貌)를 대부분 CG로 해결하려다 보니 오히려 영화 제작사의 빈약한 투자만 부각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일 아쉬워했던 것은 명량해전(鳴梁海戰)의 승리 요인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전쟁을 준비하느라 분주(奔走)하기는커녕, 조선수군(朝鮮水軍) 내부의 갈등만 많이 노출되었고 변변한 작전회의 조차 없었다. 오히려 탈영병을 참수하고 도망치는 장수를 뒤쫓으며 종군(從軍)한 아들과 술상을 마주한 채 고뇌하는 장군의 모습만 그려졌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싸웠길래 13척 대 133척이라는 절대 열세의 상황 속에서 일본함대를 물리칠 수 있었을까? 앞선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조선수군이 전멸한 최악의 상황인데 어떤 방법으로 사람들을 전장(戰場)으로 이끌 수 있었을까? 그리고 함선(艦船)의 손실이 없이 소수의 인명만 잃고서 승리하는 것이 정말 가능했던 것일까? 필자 역시 이순신 장군의 의도나 작전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당대의 기록인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명량해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다. 다만 전투의 경과와 승전(勝戰) 사실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것보다 후대의 기록인 <택리지(擇里志)>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는 좁은 물목에 쇠줄[鐵鎖]을 늘여놓고 기다리다가 일본 함선들이 걸려서 침몰하게 만들었다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록 자체가 후대에 채록(採錄)된 설화적인 내용이어서 신뢰하기가 어렵고 과학적으로도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명량해전은 오랫동안 미스터리해전으로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영화에서는 이 부분을 어떻게 풀어냈을까?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과 좀 더 실현가능했을 추론(推論)을 기대하면서 영화를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보았다.

영화 속에서 장군은 먼저 절망에 빠진 장수와 병졸들로 하여금 전투에 기꺼이 나서도록 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군령(軍令)을 어긴 병사의 참수(斬首)와 같은 방법으로는 절대로 그들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하였다. 즉 스스로 앞장서 죽을 결심을 하였다. 그렇기에 영화 속에서 장군은 작전에 골몰하는 모습보다는 장수와 병졸의 마음을 반드시 이끌어내야 한다는 고뇌어린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리고 마지막 출전(出戰)에 앞서 병사들에게 “반드시 죽고자하면 살고, 살고자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고 독려(督勵)하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미흡하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실제 전투가 벌어지자 맨 앞에 서서 혼자만의 치열한 싸움을 이어갔다. 홀로 분투(奮鬪)하는 장군의 모습과 일본함대의 선두가 서서히 무너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비로소 장수와 병졸들의 마음속에 전투의지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즉 대장에 대한 충성심과 적에 대한 적개심이 살아나고 전투에서 일말의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엿보면서 그들로 하여금 싸우게 할 수 있었다. 공황상태(恐惶狀態)에 빠진 사람들로 하여금 적을 상대로 싸우도록 만드는 방법으로 그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순신 장군 이외의 누가 실천에 옮길 수 있었을까?

그리고 장군은 조류(潮流) 뿐만 아니라 판옥선(板屋船)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술을 조용히 가다듬어 놓았다. 조류가 불리하게 흐를 때는 선두에 선 대장선(大將船)이 역류(逆流)에 배가 밀리지 않도록 닻을 내림과 동시에 격군(格軍)들이 최대한 노를 저어 함선(艦船)을 안정시키고, 화포(火砲)로 적선(敵船)을 공격하게 하였다. 적의 공세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역류에 떠내려가지 않으면서도 수많은 적선이 쉽게 조선수군의 진영으로 덤벼들지 못하도록 길목에 위치한 조그만 섬에 배를 대고 화포 공격을 계속하였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조류의 흐름이 정반대로 바뀌면서 좁은 물목에 회오리가 일자 일시적으로 위험에 빠질 뻔 했지만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여 적선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조류의 흐름이 완전히 바뀌어 순류(順流)가 되자 전투의지가 되살아난 함대를 불러 모아 바뀐 물살에 편승(便乘)하여 일제히 적선을 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화포로 장비하고 선체(船體)가 튼튼했던 판옥선의 위력이 유감없이 드러났다. 함선을 들이받거나 화포로 적선을 부수고, 화전(火箭)을 날려 적병(敵兵)을 공격했다. 게다가 일본의 함선은 화포가 없었고, 배의 구조도 약했으며, 역류하는 거센 물살에서 빠른 방향전환도 불가능했으니 속절없이 무너져갈 뿐이었다.

이렇게 이순신 장군은 영화 속의 ‘명량’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비록 세간에서 장군의 의도나 작전이 영화를 통해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다시보기’를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이미 충분히 드러나 있었다고 하겠다. 더 나아가 미스터리로 남아있던 명량해전의 역사적 실체가 영화를 통해서 보다 현실감이 있게 드러났다고 하겠다.

 유병하 <국립전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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