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초
사랑초
  • 김효순
  • 승인 2014.08.28 15: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일상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래도 계절의 변화나 자연의 이치,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은 비슷하다. 9월이 되면 누구나 가을이 왔음을 느끼고, 학교는 언제나 석별의 아쉬움과 만남의 설렘을 준비한다. 2학기 정기인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은 인사발령에 따라 학교를 옮겨 다닌다. 대개 6년 만기로 이동하기 때문에 정년 무렵에는 대여섯 곳의 학교를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진다. 간혹 같은 학교에서 두세 번씩 만나기도 한다.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고, 그 우연 속에서 인연을 맺으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해마다 이때쯤이면 이번에는 어떤 우연과 인연이 기다릴까 궁금해진다.

 어느 해 가을이었다. 같이 근무하시는 선생님 한 분이 발령이 났다. 최고 연장자이지만 사무실 내 잡다한 일을 유난히 잘 챙기셨던 분이었다. 매일 아침 가장 일찍 출근하여 창문을 열고, 겨울이면 난방기를 미리 켜놓아 출근하는 동료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컴퓨터에 문제가 있거나 무거운 물건을 날라야 할 때도 내일 네 일 안 따지고 늘 앞장서곤 했다. 후배들이 개인적으로 어려움에 부닥쳐도 열일 제쳐놓고 우선 해결해주려고 애쓰는 큰 형님, 말 그대로 빅 브라더(big brother)였다.

 사무실 내 화분관리 역시 그분 몫이었다. 분갈이는 물론이고 비실비실 말라가는 화분도 그분 손을 거치면 금방 파릇파릇 윤기가 돋았다. 모두 아쉬워하면서 헤어지던 날, “사랑초를 심었어요. 창가에 놓고 물을 잘 주세요.” 하면서 꽃도, 잎사귀도 없이 맨흙뿐인 화분 하나를 내미셨다.

 ‘사랑초’라니……. 꽃 이름이 애써 사랑을 갈구하는 듯해서 선뜻 호감이 가지 않았다.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분은 진지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훗날 꽃이 피거든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반겨주세요.’ 어디서 많이 듣던 노랫말 같아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껑충한 키와 지긋한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신파조의 말씀에 그만 가슴이 울컥하고 말았다.

 며칠이 지났다. 한낮에는 아직도 따가운 9월의 햇볕 덕분인지 창가에 놓아둔 화분에서 아주 작은 움이 삐죽이 돋아났다. 흑자주색이었다. 새싹이라면 모두가 초록일 거라는 고정관념을 깨트렸다. 추운 겨울을 이기고 새봄에 돋아나는 것은 아니지만 산뜻하고 반가웠다. 며칠이 더 지나자 손톱만 한 크기로, 다시 손가락만 하게 쑥쑥 자라났다. 점점 자라난 잎은 세 개가 모여 토끼풀 모양을 이루었고, 세모꼴 잎 하나하나는 아침저녁으로 접혔다 펴지면서 나비의 날갯짓 마냥 한들거렸다.

 한동안 출근하면 사랑초가 얼마나 자랐나 보는 것이 작은 기쁨이었다. 마치 갓난아기가 누워 있다 엎어지고 서서히 기어다니듯 새싹이 점점 자라나는 모습에서 생명의 신비함이 느껴졌다. 사무실에서 이렇게 직접 뿌리를 심어 싹을 틔운 것은 처음이었다. 문득 이런 자주색 잎에서는 어떤 빛깔의 꽃이 필까 궁금해졌다.

 알고 보니 사랑초는 괭이밥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전 세계에서 자라는 꽃이었다. 생명력이 강해 햇빛과 물, 바람만 있으면 쉽게 키울 수 있다고 한다. 활짝 핀 사랑초는 자주색 잎 사이로 작고 앙증맞은 연보라 빛 꽃봉오리가 올망졸망 달려있었다. 자주 저고리의 연보라 옷고름을 맨 자태 고운 여인을 보는 듯했다. 자주와 연보라의 배합이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그렇게 사랑스러워 ‘사랑초’라 불렀을까.

 사랑초가 주는 감동의 백미는 단연 꽃말이었다.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라는 이 한마디 말고 어떻게 사랑초를 더 함축할 수 있으랴. 그분은 이 꽃말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떠나는 자신을 기억해주고 남아있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 그분의 마음이 우연히 일치되었을까.

 하루 중 절반 가까이 직장에서 보내는 우리에게 동료는 또 다른 가족이다. 같이 웃고, 기뻐하고 같이 울분을 토한다. 때로는 가족,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언제부터인지 사랑도 여러 빛깔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때때로 가족보다 더 가깝게 느껴지는 직장 동료 간의 사랑은 어떤 빛깔일까.

 그해 가을, 사랑초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마침내 사랑초가 꽃피던 날 그분께 전화를 드렸다. “고맙습니다. 사랑초 꽃이 피는 한 언제나 함께 하는 거예요.”라고. 그리고 부디 옮겨간 곳에서도 또 하나의 사랑초를 심어 행복하게 근무하기를 간절히 빌었다.

 김효순<전주영어체험센터 원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