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구림면의 한글 공부하는 할매들
순창 구림면의 한글 공부하는 할매들
  • 고길섶
  • 승인 2014.08.27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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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길섶의 문화예술교육 현장, 사람들을 보다 3

▲ 순창 구림면의 한글 공부하는 할매들의 시작품
 “나는 이름을 쓸 줄 몰랐다 / 이름을 쓰려고 / 연필을 잡으면 / 손은 덜덜덜 / 가슴이 쿵쾅 쿵쾅 / 이름을 못 쓰니 창피했다 / 한글 공부를 하고 / 이제는 이름을 쓸 수 있다 / ”박 순 자“ / 내 이름 석자만 봐도 / 기분이 좋다”(박순자, <내 이름>)

 “공부를 못한 것이 한이 되어 / 가슴에 허전함이 한 가득 // 연필만 들면 눈앞이 캄캄 / 공책만 봐도 눈앞이 캄캄 // 캄캄한 내 인생에 / 한글 공부방은 / 한 줄기 빛이 되어 // 한이었던 내 인생을 / 아름답게 열어주네”(서영모, <한>)

 “온종일 일하고 / 새벽 네시반에 일어나 / 숙제를 하네 // 삐뚤 빼뚤 한 글자씩 / 적어가는 한글 / 머릿속 채워가는 한글 / 적어내릴 때마다 차오르는 기쁨 // 일하는 시간 / 잠자는 시간 부족해도 / 한 자 한 자 알아가는 / 한글 공부가 참 좋다”(김형자, <한글 공부>)

 늦깎이로 한글 공부하는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그 소감을 시로 표현해보았다. 한글 초보 수준은 넘어섰는지라 서툴지만 직접 연필로 쓸 수 있단다. 가슴이 쿵쾅쿵쾅해도 자신의 이름 석자를 써보니 기뻐하고, 캄캄한 인생의 한을 풀어주니 기뻐하고, 그 기쁜 마음으로 새벽 네시반에 일어나 삐뚤빼뚤 숙제를 하는 정성, 이 모습들은 순창군 구림면 장암교회 내 지역아동센터 공부방 공간에서 매주 수요일 저녁에 볼 수 있다. 순창문화원에서 구림면 북부지역의 오정자마을, 장암마을, 남정마을, 연산마을 아주머니,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부뚜막에서 펼쳐내는 책 놀이 여행” 교육 프로그램이다. 평생 연필 한번 잡아본 적 없으니 글을 써보기는 커녕 글 한번 읽어 볼 처지가 못 되었던 무지랭이의 삶, 그렇다고 그이들이 욕망과 감성마저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으니, 바로 저 자작시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겠다.

▲ 순창 구림면의 한글 공부하는 할매들의 시작품
 이 교육 프로그램은 순전히 한글만 가르쳐주려고 기획된 것은 아니다.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사업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은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는 게 아니라, 교육 참여자들의 생활 세계가 드러나는 소통과 공감, 관계 맺기와 커뮤니티, 가치의 새로운 발견과 삶의 변화 등을 필수적으로 동반하게 하는 정서적 연대의 장이자 이야기 마당이다. 서로 마음의 세계를 열도록 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책 놀이 여행’ 프로그램이 이름 이야기, 진달래 화전놀이, 동시 짓기, 그림책 보기, 역할극, 시화전 따위들을 매개로 하는 것도 이런 까닭에 연유한다. 가령, 그림책을 보면서는 관련어를 화두로 삼아 참여자들의 삶과 지혜, 일 들을 끄집어내어 이야기로 만들어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 났다. 막상 교육을 시작하고 보니 반응이 충격적이었다. “나는 한글 공부하러 왔지 이런 거 하러 온 게 아녀! 일 허고 힘들어도 공부 할라고 혔지 놀라고 그랬간디...”, “내가 뭐 그림책 보러 왔간, 한글 공부하러 왔지!” 할머니들이 세게 반발하며 하나둘씩 나오지 않았다. 재미보다도 오로지 공부 그 자체, 한글 공부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는 반응이었다. 고심 끝에 할머니들의 요구를 반영해 프로그램을 수정했고 열정적인 강사들의 노력으로 할머니들도 애초 계획했던 프로그램들에서 재미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래서 저렇게 자작시들이 나온 게다.

▲ 순창 구림면의 한글 공부하는 할매들의 시작품
 평생 숨겨지고 억눌렸거나 사회적으로 배제된 욕망과 감성이 드러나는 그이들의 부뚜막 서사성, 그 언저리에서 우리는 구림면 일대 빨치산 격전사와 같은 지역의 이야기를 재삼 확인하자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들을 자신들의 이야기로 표현하는 개개인들의 생생한 존재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밭 매면서, 콩 타작하면서 부르던 노래들을 공유하고, 고된 시집살이 속에서 숨겨 왔던 끼를 표출하게 도와주며 농촌여성으로서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펴게 만드는”, “일상 언어들로 시도 써서 벽에 붙이고 손주들에게 보여주고 연극도 하게 하여 모두 자기가 살아온 인생이 가치 있는 삶이고 대단한 사람이다 라는”, 자존감. 그 자존감을 스스로 세우도록 판을 깔아주는 4명의 협업강사들에게서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의 희망을 또 발견한다. 글=고길섶 문화비평가, 사진제공=순창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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