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과 함께 하는 시사경제] 승자의 저주
[한국은행과 함께 하는 시사경제] 승자의 저주
  • 신영석
  • 승인 2014.08.26 16: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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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라는 말이 있다. 막대한 희생을 치른 승리, 희생이 커서 이기고도 진 거나 다름없는 승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옛 그리스 지방인 에피로스의 왕 피로스가 로마를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병력의 3분의 1 이상을 잃을 정도로 희생이 컸기에 “이런 승리를 또 한 번 거두었다간 우리가 망할 것이다”라고 한 데서 생겨난 말이다.

이런 피로스의 승리를 경제학에서는 ‘승자의 저주(The Winner’s Curse)’라고 한다. 1971년 미국의 엔지니어였던 카펜(Carpen), 클랩(Clapp), 캠벨(Campbell) 등은 그들의 논문에서 승자의 저주를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1950년대 미국 석유기업들은 멕시코만의 석유시추권 공개입찰에 참여하였는데 당시에는 석유매장량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기술이 부족했다. 그래서 기업들은 석유매장량을 단순 추정하여 입찰가격을 써낼 수밖에 없었는데 입찰자가 몰리면서 과도한 경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2,000만 달러로 입찰가격을 써낸 기업이 시추권을 따냈지만 후에 측량된 석유매장량의 가치는 1,000만 달러에 불과하였고, 결국 낙찰 기업은 1,000만 달러의 손해를 보게 되었다. 이때의 상황을 두고 카펜, 클랩, 캠벨은 승자의 저주라 칭한 것이다.

승자의 저주는 경매시장뿐만 아니라 기업의 인수·합병(M&A) 과정에서도 발생한다. 인수합병 경쟁이 치열할 때 인수 희망 기업은 매물로 나온 기업의 성장잠재력이 인수자금을 능가할 만큼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비싼 값을 지불해서라도 대상 기업을 인수하려 들 것이다. 이후 경영악화 등으로 인수자금 마련을 위해 빌린 돈과 이자를 부담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고 모기업의 현금 흐름마저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된다면, 기업 전체가 휘청거리는 사태를 겪을 수도 있다.

2007년 스코틀랜드왕립은행(RBS)의 네덜란드 ABN암로은행 인수는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승자의 저주 사례로 꼽힌다. RBS는 바클레이즈와 경쟁을 해서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인 710억 파운드에 ABN암로은행을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뒤늦게 거액의 부실이 드러나고 곧이어 금융위기가 발발하면서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이 투입돼, 세계 최대의 구제금융을 받은 은행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승자의 저주를 경험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외부 차입금을 포함해 10조5천억 원의 거액의 자금으로 2006년 대우건설, 2008년 대한통운을 인수하면서 재계 순위가 14위에서 9위로 껑충 뛰었다. 하지만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 주요 계열사의 실적 부진 등이 겹치면서 유동성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2009년 그룹의 모태기업인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가 워크아웃(기업 재무구조 개선작업)에 들어가기도 했다.

 <한국은행 전북본부 기획조사팀 조사역 신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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